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맹렬하던 한낮의 열기도 기세가 꺽여 풀벌레 소리에 젖어들고, 언뜻언뜻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마을 한가운데 종탑 높은 교회에는 일찍부터 불이 켜졌습니다. 평상시도 별 말씀이 없으시던 목사님은 그날따라 정성껏 교회 앞마당을 쓸으시고, 교회 청년들은 뭔가 이상한 기계들을 끙끙거리며 본당으로 날랐습니다.


논일로 절은 땀을 얼음보다 차가운 우물물로 훔쳐낸 부모님은 이른 저녁을 얼른 치우곤, 장농 속에 곱게 개켜 놓았던 나들이 옷으로 채비를 서두르셨습니다. 마음 급한 동생은 벌써 조바심으로 대문 밖을 기웃거리고....


그렇게 짙어지는 한여름의 어스름과 함께 마을은 알 수 없는 열기로 술렁이곤 했습니다. 대문 앞에서 마주친 옆집 명철이 부모님과는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오늘 행사에 대한 기대가 화제로 오르고, 교회의 마루바닥은 하나 둘씩 마을 사람들로 채워져갔습니다.


맨 앞줄에 앉은 동네에서 가장 나이 많은 경화네 할머니의 밭은 기침소리도 잦아지고, 명화네 젖먹이의 옹알거림도 낮아질 때면, 목사님은 강대상 위로 오르셨습니다. 낮으막한 목소리의 설교와 함께 창 밖의 어둠도 자꾸만 짙어가고....


동네 개구장이들의 기다림이 한계점에 이를 무렵이면, 드디어 강대상 앞에는 눈부시게 하얀 스크린이 걸리고, 사람들은 낮은 속삭임과 기침소리, 술렁거림으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리곤 아! 흰 스크린 위에 마법처럼 나타난 영상과 소리들.... 너무도 많이 돌려 낡아진 필름은 끊임없이 「틱 틱 틱」 소리를 내고, 화면 속엔 가는 빗줄기 같은 잔상들이 쉼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 현란하고 신기하기 그지없는 「시각장치」는 아이들의 입을 떡 벌어지도록 만들곤 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그렇게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넋을 잃듯, 홀리듯 빠져든 그 화면 속의 이야기가 어린 가슴 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씨앗은 자라고 자라 신앙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먼지 켜켜로 가라앉은 「굴타리 흑백필름」이었지만, 그 어스름한 영상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추억의 영화」들이, 바쁜 일상에 치여 기억 뒷편, 저 어둔 구석으로 멀치감치 밀어냈던 그 흑백영상의 기억들이 때때로, 아주 많이 그립습니다. 눈물겹도록,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처럼, 가슴 한 구석을 저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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