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사진틀 안에서 한 소년이 해맑게 웃고 있다. 누가 봐도 "그놈 참 잘
생겼네"하고 칭찬할 만한 생김새다. 환한 햇살을 받아서일까, 웃음마저도 따
뜻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아이를 직접 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1년9개월전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이젠 편하게 쉬고 싶어'
라는 유서를 남기고. 살아있다면 지금쯤 고3 만의 열병을 앓으며 내일을 꿈
꾸고 있을 대현이. 그 많은 꿈들을 접어두고 죽음으로 안식을 얻고자 했을
만큼 대현이를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대현이의 아버지 김종기씨(51·남서울교회). 그는 자신에게 '봄'이며 '희
망'이며 '모든 것'이었던 아들을 가슴 깊이 묻고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을
만들어 제2, 제3의 대현이가 발생하지 않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재단이 만들어진 것은 95년 11월1일. 그동안 24시간 전화로 상담한 아이
들만 해도 2천여명이 넘는다. 자료집과 사례집을 만들어 전국의 학교로 보
냈으며, 서초구를 시범으로 추진한 '지킴이업소'를 통해 많은 아이들을 폭
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학교와 관공서에서 가진 강연회는
청소년폭력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체벌이라는
이름아래 이뤄지는 교사에 의한 폭력 등 아직까지 건드리지 못한 부분도 많
다.
하지만 피해자는 물론 학교와 학부모들마저 쉬쉬하며 감추려 했던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TV와 신문 등에 보도되면서 대통령이 학교폭력을 근절
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됐다. 대현이와 같은 자식을 둔 부모들로부터 전화가
잇달았고, 지킴이업소가 전국 15개 시도에 확대설치되게 됐고, 서울시로부터
여의도 청소년전용광장을 관리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또 앞으로 청소년이
주체가 되는 지킴이봉사단을 출범시킬 예정이고, 국제세미나도 준비중에 있
다. 불과 1년여 만에 청소년폭력예방에 있어서 전문기관으로 인정받기에 이
른 것은 그만큼 청소년폭력문제가 심하게 곪아있었던 것이다.
대현이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를 묻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대현
이의 죽음이 그가 현재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재단의 출발점이 됐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 했다.
폭력, 어쩌면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법한 또래아이들에
의한 폭력이 원인이었다. 강남에 살면서도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를 배정받
아 다니던 대현이는 언젠가 운동화를 빼앗겼다며 맨발로 왔다. 구김살 없던
얼굴에 그늘이 엿보이던 것이 아마 이때쯤인 것 같다. 그후 몸에 멍이 들어
오기도 하고, 치과치료를 해야 할 만큼 다쳐서 오기도 하는 등 가족의 마음
을 졸이게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때마다 대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변명을 하곤 했다.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기에 한두번쯤 있을 수 있는 일이
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 대현이도 그걸 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었
다.
"죽기 3개월 전에는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고 왔길래 다그쳤죠. 대
현인 그냥 깡패들에게 맞았다고만 해요. 바로 파출소에 신고를 했지만 흔히
있는 일인지 대수롭지 않게 처리합디다. 저도 나중에야 학교내 불량써클 아
이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처구니없더군요. 서로 친구 또는 좋은 선후배
가 될 수 있는 아이들 아닙니까."
아들의 사진에서 눈을 뗀 그는 아예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
엔 이미 봄이 와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춥고 음산한 겨울밤 같았다. 잠시 망
설이더니 아들이 죽던 날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어느 대기
업 기조실장이던 그는 출장차 중국에 가있었다. 그날따라 이상한 생각이 들
어 아침일찍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대현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자기 공부방에서 뛰어내렸는데 자동차 위로 떨어져…. 다시 옥상으로 올
라가며 집 앞에서 잠시 망설였던 모양입니다. 문앞에 피가 고여있더군요. 정
말 착하고 똑똑한 녀석이었는데…. 화장해서 속초 바다에 뿌렸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진 그도 이 일을 당하고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며 원망도 하고, 다시 살려달라는
부질없는 기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찾은 해답은 '누군가 나서야 할 일'의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변할 수 없는 사
실이었다. 그래서 따놓은 사장자리도 내놓고 이 일에 매달렸다.
그런 필연성이 그를 길고 어두운 슬픔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대현
이만의 아버지가 아닌 수많은 청소년의 보호자로 새삶을 살게 한 것이다.
그 삶이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제 봄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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