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제도 풍어제도 없는 섬마을. 남해바다 이웃 동네들의 한결같은 풍속을 거슬러가는 억척같은 사람들. 흑산군도 중에도 단연 높은 언덕을 지녔다 하여 대둔도(大屯島)라 불리는 이 섬은 그 이름만큼이나 굳고 당당하게 세파와 맞서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9월 중순. 억센 바람이 부수고 할퀴고 지나간 자리들을 꿰매러 나선 섬사람들의 표정은 뜻밖에도 밝고 활기차다. 장정들은 목재와 철근을 잡고, 아낙들은 가마솥에 불을 놓는다. 마을 사람 모두가 어우러진 것이 무슨 잔치마당 같다.
살던 사람도 떠난다는 낙도마을에는 육지에서 돌아온 젊은 사람들로 생기가 넘치고, 여기저기 새 집을 짓느라 분주한 모습이 신천지의 개척자들을 연상케 한다.
마늘 껍질을 씻어내는 여인들에게 온 동네가 한가족처럼 보인다고 말을 묻자 “저기 동네 가운데 예배당 보이지라우? 우리들 죄다 교회 댕겨요. 나는 집사, 저쪽은 권사”라며 명랑한 말투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대답을 준다.
대둔도 한쪽 끝, 복숭아골로 불리는 도목리의 풍경은 처음부터 색달랐다. 동네 수장격인 김양선 장로로부터 시작해 주민 80%이상이 기독교인인 이 마을은 그야말로 하나의 생활공동체였다. 그 중심에는 도목리 승천교회라 이름 지은 작은 교회가 있다.
민병남 목사(45)가 승천교회에 부임한 것은 5년 전. 목포항에서 쾌속선으로도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이 작은 섬에서 민 목사는 오늘까지 40년동안 이어진 작은 기적을 목격했다.
59년 1월 9일 50대 중반의 여전도사가 이 섬을 찾아왔다. 장기실 전도사. 독립투사로도 유명한 장주섭 목사의 장녀인 그녀는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다. 대둔도는 그녀가 여생을 쏟아부은 마지막 임지였다.
27년간이나 이 섬을 지키며 장 전도사는 세상에 뒤지고, 참 신앙에 눈이 멀었던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부모를 잃은 한 소년은 그의 양자가 되었고, 마을 사람 모두가 복음에 눈을 떠 전혀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장 전도사는 83세의 생애를 마치고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났지만 섬에 남은 마을 사람들은 든든하여 흔들리지 않는 교회를 세웠고, 그 소년은 나이들어 바로 이 교회의 장로가 됐다. 그들 또한 천국소망을 품고 살아가기에 교회명도 승천교회.
충성스러움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민 목사가 부임할 무렵, 도목리는 엄청난 부를 누리기 시작했다. 우럭 가두리양식이 성공을 거두면서 작은 어선을 띄우거나 김 양식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주민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수입이 생겼다.
그러나 갑작스런 풍요가 자칫 섬을 망칠 수도 있었다. 민 목사 역시 위기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왜 이처럼 큰복을 주셨는지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눈이 어두웠을 때 먼저 찾아오신 그분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돌려드립시다.”
민 목사의 설득으로 주민들, 곧 성도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거기서 또다른 역사의 문이 열렸다. 전례없는 섬교회의 도시교회 후원. 흑산면 일대 거의 모든 교회들과 심지어 울릉도와 광주에까지, 더 멀리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땅에까지 도목리 성도들의 손길이 미쳤다. 1년 선교예산만도 3500여만원.
소년소녀 가장 7세대와 독거노인 20세대 지원, 농어촌 목회자 부부 성지순례 무료여행 등 웬만한 규모의 교회도 상상할 수 없는 사업들이 벌어졌다. 머잖아 육지의 무교회지역에 승천교회가 개척한 작은 교회가 설 것이고, 승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해외 오지를 누빌 것이다.
어디 그뿐 인가. 주민 100%를 복음화 하고, 농어촌교회 30곳을 지원한다는 당찬 포부에 민 목사와 온 성도들의 가슴은 부풀어 있다. 도목리는 이제 흑산지역 25개 마을의 부러움이자 닮고 싶은 모델이 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나.
“정직과 성실의 모범,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잃지 말자고 늘 기도와 말씀으로 저 자신을 채찍질하겠습니다. 우리 승천교회가 이 시대에 농어촌 선교의 모델이 될 수 있다면 저의 섬 목회는 결코 외롭거나 힘들지 않을 겁니다.”
부임후 얼마 안돼 목사 위임식을 하면서 온 성도들과 노회원들 앞에서 공포한 이 약속을 민 목사는 지금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자신과 호흡이 척척 맞는 성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마흔 다섯의 젊은 목사는 행복해 보였다.
도목리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이웃 마을 둘이 나타난다. 그 중 섬의 중심을 이루며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수리. 이곳에는 민 목사와 총신 83회 동기인 정삼석 목사(51)가 또다른 모습으로 목양지를 일구고 있다.
분교와 출장소가 있는 마을 중심이기는 하지만 도목리에 비해 어딘가 생기가 덜해 보이는 동네. 17년 전 정 목사가 이 섬에 왔을 때는 더욱 참담했다. 개신교 천주교 거기에 이단까지 한차례씩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가버린 마을에는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 황폐한 영혼들만 남아있었다.
30대 중반 피끓는 젊은 목회자의 열정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분위기가 마을을 억누르고 있었다. 교회를 새로 개척하다시피 하며, 소득 없어 보이는 사역을 이어가기 수년여. 모두가 그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에서 목회하는 동기생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자신만 뒤쳐진 것처럼 생각돼 괴로움도 심했다.
“주님은 아신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분이 좋아하신다면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
결국 그는 호적까지 섬으로 옮기고 섬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그 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혼자서 깊은 우물을 파는 힘겨운 일에 도전해 성공하자 섬사람들은 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용기를 얻은 정 목사는 주민들을 설득해 마을 당산제를 폐지하게 만들고, 젊은 부부들을 위해서 어린이집을 열기도 했다. 요즘은 마을에 도서실과 인터넷 시설 등을 갖춘 문화회관을 짓는 일로 골몰하는 중이다.
쉽게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면서 주민들은 이제 그를 진정한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산제 문제로 맞섰던 마을 이장은 어느새 수리교회 회계집사가 됐고, 새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섬에서는 하루 종일 보이는 것이 파란 하늘뿐입니다. 어떤 때는 저 하늘이 유리창이라면 다 깨부수고 도망쳐버릴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육지와는 완전히 단절하고 사는 삶 밖에 이곳에서 승리하는 다른 비결이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동료인 민 목사는 그래서 정 목사 삶을 ‘수도사’와 같다고 표현한다. 수많은 영적 장애물들을 이겨내며 작은 승리에서 오는 감격과 감사의 의미를 뼈저리게 체험한다고 증언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스타일로 목회를 펼치지만, 그들은 같은 섬에서 같은 목표를 두고 일하는 동역자들이다. 대둔도와 그곳에 사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을 가득 채운 두 섬지기들의 작은 승리들은 오늘도 남해안 푸른 물결 위에서 더욱 큰 기적을 일구어 내고 있는 것이다.
글·사진=정재영 기자 jyjung@kid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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