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어쩌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거나 아니면 악순환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새로 출발하는 신생국가가 해야할 첫 번째 과제는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러므로 해방이후 한국의 정치는 그 출발부터 윤리와 도덕이 결여된 것이었다. 윤리와 도덕의식이 근본적으로 결여됐기 때문에 정치에 있어서 부정부패가 싹트고 자라서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이다.
우선 다른 것은 고사하고라도 최근 젊은 국회의원들 중에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살려서 후대에 전승하자는 목적으로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여 발표한 신문보도를 읽고 필자는 만감이 교차하는 생각에 잠시나마 사로잡혀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다.
과거에 저지른 총체적 잘못에 대하여 민족적인 반성이나 참회 없이 단지 친일파들의 명단이나 작성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 명단을 작성하기 전에 했어야만 할 것은 반성문 같은 것 하나쯤 3·1절을 기념하는 식장에서 낭독이라도 한 다음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해방 이후 민족적 차원에서 과거 일본제국에 아첨하고 협력하면서 민족 반역을 감행한 일에 대해서 뼈가 아프도록 회개하거나 참회한 일이 없었다. 특히 한국 교회는 해방을 맞이하여 과거 신사참배한 것을 뉘우치기는 커녕 그것이 무슨 큰 과오였기에 이러쿵저러쿵 하느냐고 코방귀를 뀌는 자세였다.
일제하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목사님들은 주로 경상남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경남노회가 본 고장이었다. 주기철 한상동 이인재 황철도 조수옥 등 모두가 경남노회 출신들이다. 그런데 그 노회 안에는 신사참배를 솔선수범했던 김길창 목사도 있었다. 해방 후 신사참배문제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총회적 차원에서 김길창 목사의 손을 들어준 사람이 총회의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였다. 그는 본의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일본 기독교단 조선지교단의 통리였다. 결국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친일파가 같은 친일파를 살려 준 셈이다.
반면 한상동 목사는 도리어 교회를 시끄럽게하는 주동 인물로 둔갑됐다. 이것이 해방후 한국 교회의 실상이었다. 김양선 목사는 1956년 〈한국기독교 해방10년사〉에서 고려파를 동정하고 두둔했다는 이유로 총회에서 호되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어제는 신사참배 안한다고 노회에서 제명하고 쫓아내더니 오늘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듯이 뻔뻔스럽게도 총회나 노회에서 제명한 목사의 이름을 버젓이 불렀던 한국 교회, 웃기는 한국 교회였다.
1947년 새문안 교회에서 총회가 소집됐을 때 서기가 총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자리에서 참관인으로 참석했던 한부선 선교사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자 즉시 “아니오. 나는 1941년 만주 봉천노회에서 제명당했습니다”라고 했다. 호명하기 전에 복직절차를 총회가 솔선 수범하여 밟아야했던 것이다.
한국 민족이나 한국 교회는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서 이렇다 할 공적 참회나 사과 없이 무시해 버린 채 57년 간 살아왔다. 이제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16명을 더 삽입시키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는 역사학계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서 심사케 할 일이겠지만, 필자는 그것보다 앞서 민족적인 반성과 교회적인 회개가 실질적으로 선행돼야 한다는 것을 거듭 주장하고 싶다.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교권으로 정죄한 총회의 처사부터 회개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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