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을 보고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술책에 대해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문제이지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은 관심도 없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있다. 일본 북부의 설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철도원>.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철도’는 일본의 국가 혼을 상징하고 있다. “눈 속에 슬픔을 묻어라 철도원이여. 건강을 해쳐가며 깃발을 흔들고, 눈물을 삼켜가며 호각을 분다”는 ‘철도원의 노래’나 복명복창은 군대를 보는 듯하고, 대를 이어 철도원이 된 것에 대해 부러워하고 졸업생 전원 취업이 자랑스러워 만세를 외치는 철도학교 교장의 모습을 보면 서구 제국주의와는 다른 일본 제국주의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사무라이 직업관’, 이른바 천직(天職)관이다. 심지어 주인공 오토는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는데, 친구의 아내가 찾아와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고 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난 철도원이니까 집안 일로 울 순 없어요.”
이것은 꼬리만 살짝 드러낸 교묘한 극우주의이다. 오토와 친구인 센이 철도 노조의 파업 결의 때에도 열차 운행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는 회고를 통해서도 이런 집단주의는 드러난다. 오늘날 일본이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일본 정신에 반대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직관으로 포장한 은근한 전체주의에 일본인들이 감동한 모양이다. 이 영화는 1999년의 일본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400만 명이 개봉관에서 비장미 넘치는 오토의 최후에 눈물지었다.
오토는 눈이 많이 온 날, 제설차를 기다리다가 플랫폼에서 죽는데 틀림없는 자살이다. 평생 일하던 철도 노선의 폐선과 맞추어 정년퇴직하게 될 오토는 초라하게 살기보다는 장렬하게 철도원으로 죽고 싶었던 것. 눈 속에 엎드러진 오토 옆의 붉은 수기(手旗)가 흰 눈과 대비되는 선명한 모습은 마치 할복자살한 사무라이의 피를 연상시킨다.
영화는 이러한 사무라이 정신을 담은 직업관을 가진 오토의 희생정신을 찬양한다. 개인보다는 조직, 가정보다는 회사와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식이다. 그의 우선순위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주장이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을 일본 되게 한 원동력이라는 강변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설경을 보고 그저 감탄하거나 천직관에 감동하다보면 영화의 의도를 놓치기 쉽다. 이 영화가 감동적으로 포장하는 제국주의 회귀의 욕구나 전체주의에 대한 향수에 일본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부는 더욱 자주 그들의 속내를 드러낼 것이다. 독도 문제가 바로 그런 현상 중 하나다.
한일관계가 경색되면 경제적으로 우리가 더 손해 본다지만, 눈치 보는 조용한 외교를 포기한 정부는 바람직해 보여 더욱 지혜를 발휘하기를 응원한다. 그러나 이제 곧 방영될 티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23전 23승을 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시위하고 언론이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듯하다. 세계는 이미 독도를 영유권 분쟁이 있는 지역으로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럼 어쩌면 좋은가? 작년에 일본에서 수백 명의 일본 크리스천들이 아멘을 외치는 모습을 보고 일본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복수’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독도문제를 포함한 한일 간 국가 관계의 해결책도 아닌 것 같다. 기도 시간마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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