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판’을 보고


지난 설날 연휴에 티비에서 이란과 이라크 국경 지대를 떠돌며 사는 쿠르드 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방영했다. 영화 내내 칠판을 둘러맨 남자들이 가르칠 아이들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대로 <칠판>이라는 제목이었다.
이보다 처절하고 눈물 나는 ‘교육의 상업화’가 있을까? 칠판을 등에 짊어지고 잰 걸음을 치는 남자들은 직업 교사들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찾아다니다가 어디에서나 칠판을 내려놓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들이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돈을 받은 경우는 영화 내내 한 번도 없었다.
마을 쪽으로 내려간 사이드는 아버지가 선생이 되면 후회한다고 양치기나 하라고 했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고 푸념한다. 사흘간을 돌아다녀도 학생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구구단도 가르쳐 드립니다. 선생 필요하지 않으세요? 읽기나 편지쓰기 싸게 가르쳐 드려요”라고 외치며 산 쪽으로 양치기 소년들을 찾아 나선 리부아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고는 대목을 만난 줄 안다. 이라크 쪽에서 이란으로 국경을 넘어 밀수품을 등짐으로 나르는 ‘일하는’ 아이들이었으나 반응이 냉담하다. 어떻게 하든 설득해보려고 하지만 아이들은 감시원을 피해 짐을 날라 주고 일당을 받는 일이 더 급하다. 답답한 리부아르가 소리친다. “글을 알면 세상이 달라 보여. 미래를 생각해야지!”
어떻게든 가르치고 싶은 선생들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교보재인 칠판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 아이가 떨어져 다치자 리부아르는 칠판의 반을 잘라 다친 아이에게 부목으로 대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 열리고 리부아르는 한 아이에게 이름 몇 자를 가르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감시원에게 발각된 아이들은 다수가 목숨을 잃는다.
이라크 국경 근처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사람들을 만난 사이드의 칠판은 더욱 다용도이다. 일찍이 공습을 피하는 도구로 황토를 칠해 위장하기도 했던 칠판은 걷기 힘든 사람을 위한 들것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아들만 하나 둔 과부 딸을 결혼시키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노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결혼 예물로도 활용된다. 빨래를 말리는 건조대가 되기도 한다.
국경에 다다른 후 사이드는 함께 가자는 ‘장인’의 권유를 거절하고 그곳에 남겠다고 한다. 그러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는 노인의 강짜에 결국 사이드는 칠판을 이혼 위자료로 주고 만다. 글을 가르친 대가가 아니라 길을 안내해 준 대가로 받은 호두알 몇 개만을 받은 채 칠판도 잃은 사이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양치기로 살아갈 것인가….
요즘 우리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니 슬프다. 아이들은 대학입시를 치르면서 휴대폰 강국의 면모를 과시했는데(?) 관리 책임을 진 교육부 당국의 안일함은 세상을 놀라게 한다. 어떤 선생들은 제자의 시험 답안지를 고쳐주는 지극한 친절을 베풀고 있다. 철없는 아이들을 탓할 염치가 없다. 교육의 산업화 논란과 관련해 한 라디오 방송에 나온 패널들은 서로 막말을 하며 싸워대고 있었다. 어른이 문제고 먼저 태어나 가르친다는 선생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칠판 선생’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늦은 밤까지 보면서 잠이 싹 달아났다. 그래서 희망을 잃지 않고 싶다. 저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아이들을 찾아나서는 참 선생들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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