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 빅, 부우욱” 거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가 심상치 않다. 연주소리가 아니라 소음에 가깝다. 시간이 좀 지나니 제법 정돈된 소리가 나고 성탄 찬양인 노엘이 울려퍼진다. 매끄럽지는 않지만 성탄절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였다. 아이들의 연주를 듣다가 밖으로나가 아내와 함께 가장 감동받은 청중이 되어주었다.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소리도 내고 아주 간단한 곡을 연주한 걸음마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힘껏 박수를 쳐주었다. 탁월한 연주가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 저녁마다 나름대로 괴상한 소리들을 내면서도 참고 노력하는 아이들의 노력이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즐거워하며 노력한다는 것이 감사하였다. 아이들을 통해 발견한 행복은 부족한 모습 속에서 찾은 감사였다.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한 감사처럼 지난 한 해를 뒤 돌아보니 감사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풍성하지 못했지만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것 같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일년동안 사람들과 만나 나누었던 말들을 생각해보니 “감사하다, 행복하다, 소망이 있다”는 말보다는 “힘들고 어렵다, 안 되어진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보는 프리즘들이 있다. 그래서 각자 자기만의 기준과 경험세계를 기초로 사물과 사건들을 이해하고 바라본다.
인터넷에 “나는 날마다 행복하다”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때로는 머피의 법칙을 들먹이며 불평할 만한 일들을 감사로 전환시켜 놓은 글이었다.
행복은 누군가 나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현실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어질 때 찾게 되어지는 숨겨진 보물이다. 웃을 수 있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웃어질 수 있는 것처럼, 감사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충족되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감사의 빛줄기를 찾아내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감사(thanks)는 생각(think)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듯이 생각과 태도가 행복을 결정지어준다.
감사와 불평은 벽에 던지는 공과 같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매사에 감사할 것을 찾아낸다. 그러나 반대로 불평을 자꾸 하는 사람은 오나가나 불평거리만 찾아낸다. 그리곤 원망한다. 나에게 왜 자꾸 이런 일만 생기는냐고. 한 해동안 어떤 일들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관심보다 우리가 감사할 내용들에 관심을 갖는다면 행복을 지키는 가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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