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Bruce Finley Hunt 1903-1992)의 출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념하는 강좌와 예배가 미국의 여러 한인 교회와 신학교에서 잇달아 열렸다.
지난 6월 22일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복음대학교(Evangelia Uni-versity)에서, 6월 28-29일에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그리고 7월 5-6일에는 애틀랜타 늘푸른장로교회에서 열린 이번 한부선 기념 강좌에는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역사신학)가 ‘한부선 선교사의 성장배경과 신학형성’을, 홍치모 명예교수(총신대)가 ‘한부선 선교사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그리고 이근삼 총장(복음대학교)이 ‘한부선 선교사의 해방이후 사역’을 각각 발표했다.
박응규 교수는 한부선 선교사의 신앙과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출생으로부터 청소년기까지를 보낸 한국에서의 경험과 이후 미국에서의 학업 등을 배경으로 조명했다. 특히 박 교수는 구 프린스톤에서의 학문과 경험들이 한부선의 신학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철저한 적용했다는 사실이 그의 선교사역을 고찰하는 데에 매우 필수적인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구 프린스톤 신학 철저히 견지 네비우스 선교방식 시행 적극”
■ 박응규 교수의 ‘한부선 선교사의 성장 배경과 신학 형성’ 요약
한부선 선교사는1903년 6월 4일 평양에서 사역하고 있던 헌트(William Brewster Hunt, Bertha Violet Finley Hunt) 선교사 부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개척 선교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부선은 어렸을 때부터 각종 전도 모임, 성경학교, 그리고 사경회 등에 참여하며 아버지의 사역과 열심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한국인 성도들의 삶에 나타나는 기독교 사랑과 변혁의 힘을 가진 기독교 믿음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부선은 복음의 힘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인종이나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그리스도인들간의 격의 없는 친교를 체험하였다.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닌 한부선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91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역사적인 삼일절 독립 운동의 행진을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목격하였다. 평화적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사용한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방법들이 십대의 나이에 학업을 위하여 미국으로 떠나는 한부선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게 되었다.
1920년 한부선은 일리노이주 휘튼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시절 한부선은 영적인 고민의 기간을 거치며, 결국 중생의 체험과 선교에의 헌신을 함으로써 인생의 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럿거스 대학으로 전학하여 그는 세속적인 학문과 자유주의를 접하였고,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적인 논쟁을 목도하게 되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프린스톤에서의 그의 삶은 장래 선교사로서의 그의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한부선의 프린스톤신학교 생활은 교내의 신학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전개되고 있었다. 교수와 학생 모두 메이첸을 지지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양분되어 신학적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부선은 메이첸의 신학적 입장과 현대주의의 도전에 응전하는 자세에 지지하고 있었던 복음주의 신학생 협의회에 가담하였다.
구 프린스톤 신학을 철저하게 방어해 나감으로 개혁신학의 유산을 수호해 나가려는 메이첸의 의도는, 훗날 한부선을 통해 한국과 만주라는 선교지에서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강요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고 파괴하려는 시도를 분쇄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부선은 누구보다도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철저하게 시행했던 인물이고, 성경중심적인 특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적 전통을 통해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이 계승되고 발전된다고 확신하였다. 구령 열정을 가지고 다양한 전도 활동에 참여하였고, 그리고 소외되고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사업에도 적극적이었으며, 교육 및 문서 보급을 통한 선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부선은 성경중심적인 신앙에 토대로 한 전도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으며, 그의 신학적 성향은 칼빈주의를 지향하면서도, 변증적인 태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신앙을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속에서 지켜나가는 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철저하게 믿었다.
한부선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 경험한 신학적 갈등과 논쟁이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누구보다도 자유주의 신학의 파급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그의 사역에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도 “우상숭배의 이교적 제의에의 굴복이냐 아니면, 극복이냐”라는 차원과 함께, 그는 “기독교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참된 기독교 신앙, 한국장로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역사적 신앙을 유지시켜 나갈 것인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대처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부선은 신사참배 강요문제를 신앙의 절개를 어떻게 지키느냐라는 차원과 함께, 기독교 신학의 변질의 요인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장로교 신학의 정체성을 충실히 지켜 나갈 때, 역사적 기독교의 본질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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