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창 목사(원평교회)

우리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세상의 만물 중에 최고의 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거대한 땅과 공기, 물, 캄캄한 밤하늘의 별들, 달빛, 이글거리며 타오르며 꺼질 줄 모르는 신비의 태양 빛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그 모든 것을 은혜로 거저 주셨습니다. 결실의 이 가을에도 천산만야의 오곡백과가 무르익게 하시고 가을철에 기암절벽 만악천봉에 곱게 물든 단풍이며 길거리에 곱게 핀 들국화의 그윽한 향기며, 달 밝은 가을밤에 짝을 잃은 외기러기의 구슬픈 울음소리도 인간 능력의 한계를 아시는 주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좋은 부모님을 주신 것도 은혜요, 좋은 자녀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은 일반 은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은혜는 불신자들이나 또 성도들에게 차별 없이 거저 주신 일반 은혜입니다(마5:45). 그런데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불신자들이 알지도 못하는 은혜를 하나 더 주셨는데 그것이 무슨 은혜일까요? 그 은혜를 특별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천국의 후사로서 우리를 영벌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 그 은혜가 특별 은총인 것입니다(엡1:4∼6). 이 구속의 특별 은총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감사는 불신자들의 감사와는 그 질이 다르며 차원이 다르고 그 중심이 달라야 합니다.
가정에는 부모형제들을, 교회에는 목사와 성도들을, 병원에는 의사와 환자들을, 학교에는 스승과 학생들을, 국가에는 대통령과 백성들을, 회사에는 직장과 일감을 주시는 것은 다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들인 것입니다(시127:1).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동원하시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특별히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요 근원이십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는 줄기요 가지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간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분초라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1. 은혜를 베푸신 목적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성도의 생활이 되라는 것이 은혜 베푸신 목적입니다. 본문 4절에서도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엡5:20, 살전5:18).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은 감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성도를 기뻐하시며 그 감사를 기쁨으로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감사를 받으심도 우리에게 은혜를 더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여리고 성 기생 라합처럼, 오른편 십자가의 강도처럼 타락으로 살아왔던 나 자신이 이제는 주님을 만난 후 날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감사하며 미래의 소망을 굳게 붙잡을 때, 북받쳐 올라 참을 수 없는 기쁨이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오곡백과를 주신 감사, 건강에 대한 감사, 물질에 대한 감사, 자녀에 대한 감사, 사업에 대한 감사, 처세에 대한 감사, 이런 감사는 깊은 감사가 못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까닭 때문에 조건부적인 이방인들과 같은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오곡백과 때문에 감사하는 자는 흉년이 들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 때문에 감사하는 자는 병이 들면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은 궁핍이 올 때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기 때문에 바른 믿음의 감사가 되지를 못합니다. 변화무쌍한 외적인 것에 감사의 기준을 두면 감사도 물론이거니와 믿음도 필경은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감사표준은 물질, 사업, 출세, 건강, 장수, 명예와 같은 썩고 변질되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구원’에 기준을 두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13:8). 우리를 구원하시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신다고 하셨으니 전혀 변할 수 없는 구원인 것입니다(딤후4:18).
성도는 이 변하지 않는 구원에다가 감사의 기준을 두고 살면 어떤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절대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한국의 불교와 유교의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샤마니즘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것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기 위해 이런 찬송을 목청 높여 부르게 되지 않습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오늘날 한국교회가 큰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은 축복 축복하면서 물질주의와 만사형통주의, 그리고 무속주의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복음과는 왜곡되게 나가는 교회 아닌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교회에 몸담고 있는 성도들이 조금 물질에 시험이 오면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시험에 빠져 낙망하고 좌절하여 넘어지는 성도들이 부지기수인데, 이는 한국교회가 진리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성도들을 잘못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교회가 로마교회의 전철을 밟다가 몰락 했고, 영국교회가 역시 독일처럼, 그리고 지금은 미국교회가 망하여 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도 쟁쟁하던 로마 독일 영국 미국 교회들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교회에서 영원한 구원의 가치성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물질제일주의, 지상제일주의만을 계속 강조하게 되니 교회를 찾은 성도들이 나중에는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다 떠나버린 결과인 것입니다.

2. 감사하는 성도
원인없는 결과가 없는 것과 같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이 둔화되고 있음은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연유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세상 것을 먹이는 잘못을 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도가 복음으로, 바른 신앙으로 양육 받지 못하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바로 믿지를 못하며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도는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순경이든 역경이든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성도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진 자들이 구약에서는 욥의 신앙을, 신약에서는 바울 사도의 신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은 어떤 까닭에 감사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욥1:8)사탄에게 물은즉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1:9)말할 때 하나님은 그 말을 인정치 않으셨습니다. 욥은 물질에도 고난에도 동요 받지 않는 그 근원이 구원에 뿌리를 박은 감사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자녀가 떼죽음을 당하고 하루사이에 전 재산이 잿더미가 됐으며, 부인마저 욥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거기에다가 욥은 설상가상으로 몸에 한센씨병 같은 악창이 발하였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친구들마저 찾아와 조롱했습니다. 이만하면 열번이라도 하나님을 원망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렇게 고난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알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욥1:21∼22).
이 얼마나 고귀한 신앙이며 절대적인 감사입니까? 우리도 욥의 신앙을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나는 까닭 때문에 감사가 식어가고 있지 아니한지, 나는 물질 때문에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든 청년처럼 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하나님께 ‘차압’당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막10:17∼22).
여러분 ! 성도는 ‘구원’의 절대적 감사로 신앙생활에 성공 길을 걷는 믿음 제일주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감사의 기준을 외적인 물질의 유무에 두지를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날 구원해 주신 ‘구원’에다가 두고 자기의 신앙 양심에 따라 물질로, 몸으로, 마음으로 감사를 할 때 반드시 실패하지 아니하고 영육간에 놀라운 축복으로 크게 성공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희창 목사<원평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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