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수 목사(신반포교회)

부활절이 다가 오면 교회마다 여러 행사로 북적거린다. 그러나 연례 행사로 그치는 안타까움이 있다. 만일 부활절이 2000년 전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잔치로 그친다면 박물관의 소장품을 꺼내 전시회를 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활절은 행사가 아니라 부활 신앙의 회복을 위한 모멘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신앙의 무기력증과 매너리즘의 낡은 껍질을 깨뜨리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이번 부활절에는 구호만의 부활이 아니라 진정한 부활 신앙을 회복해 보자. 마른 뼈처럼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영적 패잔병들이 살아나,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변화되는 역사를 일으켜 보자. 그들을 통해 세상 곳곳에 구원의 복음이 증거되고 부패한 세상이 새롭게 변혁되는 부활의 새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부활 신앙을 재조명해 본다.

부활 신앙의 내용
부활 신앙을 간명하면서도 함축적으로 설명해 놓은 글이 있다.
“현 시대는 부활절 시기이다. 그것은 구세주의 부활로 시작하여 구속받은 자의 부활로 끝난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영적 부활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으며, 첫번째 부활절의 능력으로 마지막 부활절을 맞으러 간다.” 신학자 에릭 싸우어의 글이다.
부활 신앙은 예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해 장차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성도의 부활을 소망한다. 그 확신과 소망을 품고 오늘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며 생생하게 체험하는 영적 능력이 곧 부활 신앙이다. 한 마디로 부활 신앙은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살아 있는 신앙’이며 ‘현재형 신앙’이다.
①부활 신앙의 출발점: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성에 기초한다(롬10:9). 이것이 곧 기독교의 두 기둥이다. 그런데 그 중에 더 중요한 것이 부활이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 사건은 한낱 해프닝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고, 신앙 자체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5:14,17). 곧 그리스도의 구속 자체가 무효화된다는 말이다. 오직 부활로 인하여 그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구속주 되심이 공인되었다(롬1:3~4). 말하자면 부활은 “다 이루었다”(요19:30)고 외친 성자 예수의 선언에 대한 성부의 “아멘” 화답인 셈이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이 이처럼 중요하기에 사단은 기독교 2000년 역사 내내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기절설, 시체도난설, 무덤오인설, 환상설, 환각설, 강령설, 신화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빈무덤,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증인들(고전15:5~8), 초대교회의 설립, 사도들의 극적 변화, 주일 제정 등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는 그 어떤 역사적인 사건보다 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이 극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행2:14~47)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② 부활 신앙의 지향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구속에 대한 근거이다. 중생(벧전1:3)과 칭의(롬4:25) 등 구원의 동인이다.(롬5:10) 또 궁극적으로는 몸의 구속, 즉 성도의 부활에 대한 동인이다(빌3:10~11)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 말하자면 부활이라는 전 수확물의 첫 이삭(레23:10)으로 나머지 수확분인 성도들의 부활에 보증이 되신다. 성도들은 재림의 때 분명코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15:22~24). 또한 그때 성도의 부활체는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닮게 될 것이며(고전15:47~49, 빌3:21, 요일3:2), 그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유업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고전15:50) 따라서 모든 성도들의 지향하는 바 유일한 소망은 바로 그 부활의 날, 영광과 승리의 날인 것이다(롬8:23, 고전15:51~53).
③ 부활 신앙의 현재성: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다.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 가운데 항상 임재하신다. 승천하실 때 남긴 약속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증한다(마28:20). 그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어 성도들과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신다(요14:16~20). 또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교회와 성도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며 간섭하신다(막16:19~20, 롬8:34, 요일2:1).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한 ‘예수 행전’이고 ‘성령 행전’이다. 부활 승천하셔서 영화로워 지신 예수님은 교회와 제자들의 삶을 친히 주관하셨다(행2:47, 7:55, 9:3~5,15, 10:9~16). 또 그의 보내신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시고 역사하셨다.(행2:1~14, 4:31, 13:2, 16:6).
여기서 우리는 초대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의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어떤 핍박과 고난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파했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드러냈다. 그것은 결코 그들 자신의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부활의 주님이 한없이 부어 주시는 영적 능력의 결과였다. 정말 그렇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께서 이미 그들을 구원해 주셨고,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며, 사망도 삼킬 부활의 소망을 분명히 주셨을진대 무엇인들 두려워했겠는가? 목숨 걸고 부활의 복음을 위해 살았던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결국 무서운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부활의 복음은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곧 부활 신앙이요 살아 있는 신앙이다.

부활 신앙과 성도의 삶, 그리고 교회의 사명
우리는 흔히 초대 교회 제자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곤 한다. 정말 놀랍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의 모습을 그저 지구 반대편에서, 그리고 까마득한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의 편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상관없는 방청객인 양 살아간다.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채 번번히 패배하면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대로 제 구실을 못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의 회복은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요구이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부활 신앙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초대 교회 제자들이 경험한 모습들을 고스란히 열매로 나타낼 수 있다. 물론 그들과 똑같은 모양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이 시대 상황 가운데 부활의 주님이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리라 분명히 확신한다.
① 고난 가운데 승리하는 삶: 세상은 광야와 같이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곳이다. 사망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게다가 죄와 어둠의 세력이 가하는 핍박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도가 걸어가는 길은 가시밭 길이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함께 계신다. 그는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신 승리의 주님이시다(요16:33). 고난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그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은 부활 신앙인에게 주어진 분명한 축복이다(롬8:34~39, 고전15:57).
②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삶: 만일 이 세상이 끝이라면 이 세상에서 순간 순간 육신의 정욕대로 즐기며 사는 게 최고일 것이다. 바울 당시 에피큐로스 학파의 슬로건이 꼭 그랬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15:32). 그러나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기에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고(마6:19~2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벧전2:11) 살아간다. 성경적인 거룩한 가치관(마6:33, 골3:1~2)과 그리스도를 닮은 고상한 인격(엡4:15)이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다. 우리는 그것으로 거룩한 신부로 준비되며, 장차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계19:7~8).
③ 세상을 새롭게 하는 변혁자의 삶: 이 세상은 분명히 장차 없어질 장망성이다. 그리고 우리의 본향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이다(히11:13,16, 계2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셨고 또 분부하셨다(막1:15, 마6:10, 눅11:20, 17:20~21).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성도들을 통해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신다. 부활의 영은 생명을 살리는 영일 뿐 아니라 새 창조의 영이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일 뿐 아니라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부정과 불의로 황무해진 이 땅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사명이 부활의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과 교회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마5:3~16, 대하7:14).
④ 선교 사명에 헌신하는 삶: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처음 하신 말씀도, 승천하면서 마지막 주신 말씀도 선교 명령이었다(요20:21, 마28:18~20). 부활의 복음이 세상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 후에야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다(마24:14). 그날 이후 소망하던 성도의 부활과 하늘의 영원한 상이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인 동시에 성도와 교회의 특권이요 축복이다.(고전15:58, 딤후4:7~8). 초대 교회 제자들은 이 사명을 위해 헌신하며 순교도 불사하였다. 그래서 순교자라는 영어 단어(martyr)가 증인이란 헬라어( , 행1:8, 22:20)에서 나올 정도였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성도와 교회들은 선교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가든지 보내든지 순교자적 각오로 헌신해야 마땅하다.
다가오는 부활절에는 우리도 모르게 상실했던 부활 신앙을 회복해 보자.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부활의 노래를 목청껏 외쳐 보자. “예수 예수 늘 살아 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알프레드 액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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