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에 김홍집을 중심으로 17명이 모여, 한민족이 살던 집을 5개월만에 전면 개조했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타파하고, 백정과 광대들의 천민신분을 폐지하며, 왕실과 정무를 나누고, 개정을 일원화 할 뿐만 아니라 돈도 새롭게 만들고, 고관을 지낸 사람도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한 나라의 ‘새 집짓기’ 말이다. 곧, 갑오개혁이다. 이렇게 마련한 집 틀을 조금씩 고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크고 강해졌고, 한국 선교사는 아프리카, 시베리아, 남미의 정글에서, 그리고 구소련과 모슬렘 국가에서 새 나라를 만드는 건축가가 되었다. 설계하고, 목공일도 하며 새로 지어질 집을 꿈꾸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손수 시멘트를 비비고, 벽돌을 쌓고, 건축자제상을 오간다. 오 주여, 내가 짓는 이 집이 단단하고, 실용적인 집이 되게 해 주십시오. 새마을이 되게 하시고, 이 선교지가 한국과 같이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를 수 있는 나라가 속히 되게 해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같이 빨리 예수 믿고, 복 받는 나라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 사회의 틀은 그 안에 사는 사람에게 정신적 안정감과 힘이 된다. 이 안에서 신앙심이 열정적으로 불타고, 성취감을 얻고, 삶에 의미도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자신이 살던 틀 밖에 나가 다른 틀에 놓이면 당황해 한다. 그는 잊고 있었다. 어떠한 틀이 단순히 “아이디어가 발전된 한정된 것”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 안에만 살아온 사람은 이 틀이 자기 삶의 한 부분이었고, 전통이었고, 그래서 이것이 신앙의 형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 선교사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선교사들은 세계 여러 형태의 나라들에 떨어졌다. 영혼구원에만 전념하겠다는 선교사는 이러한 사회의 틀 차이에 대한 갈등은 좀 적을 것이고, 선교지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갖고 어떤 비젼을 생각하는 선교사들은 나름대로 고민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옛집에 살 듯, 한 사회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일반적인 자세’를 벗어나 앞으로 ‘도래할 어떤 상태’를 바라보고 선지자적인, 사도적인, 그리고 교사적인 위치에서 새집을 지어가려는 자의 갈등이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 속에서 살아온 한국 선교사들은 우리가 살아왔던 집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살펴볼 심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다만, 우리는 자기 세계파악 과정에서 얻어진 직관적 인식을 가진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귀속본능에 따라 어제의 집을 여전히 우리 마음의 안식처요, 언젠가 돌아갈 고향집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옛집과 선교적 비젼 가운데 선교사는 카롤(Caroll)의 표현대로 두 개의 사진을 겹쳐놓은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직관적 인식이 개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 같이 어제 살아온 옛집과 내일의 성취할 본향 사이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 때에, 우리는,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의 자손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신천지를 사모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신명기를 배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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