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오린 기간 활동해 온 신내리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로서 신앙교육서를 통한 교리문답 교육의 부재를 꼽는다. 여러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소요리문답같은 성경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80년대 후반으로 다가가면서 대형집회의 참여율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교회개척이 어려워지고 교인들의 타교파, 타교회로의 이탈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목회자들은 교회부흥에 대한 묘수를 찾기에 전전긍긍한 모습이 뚜렷해졌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교회문제는 그것의 외형적, 양적 부흥인 듯한 인상을 주는 대안들로써 우리의 눈길을 끄는 여러가지 색깔의 프로그램들이 전시되고 있다. 교회의 외형적 성공을 위해선 좋다는 것은 다 해보는 현상이다. 신앙의 대중화현상이 아닐 수 없다. 교인의 수가 적은 목회자로서는 도전해 보고 싶은 내용들이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부흥세미나에 참여하고 심지어 미국까지 가서 배워오는 실정이다.


이렇게 양적 부흥에 열중하다 보니 교인들의 신앙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분별력이 부족하여 경건생활은 힘을 잃어 나약한 신앙인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 애석한 마음으로 보고 있다. 장로교회 교인들마저도 대다수가 신앙고백이나 신조들, 그리고 대·소요리문답이 무엇인지 또 있는 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기독교신앙은 교리와 신조를 매우 중요시하는 종교다. 그 중요성만큼이나 이는 이방종교들처럼 기존의 종교적 심리적 현상들을 자극하거나 확대해 가는 구도의 길이 아니라는 것의 증거임에 틀림 없다.


교리는 신앙의 체계화이며 의식화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의식화된 교리는 반드시 삶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이끌어 가는 힘과 지혜로 발전한다. 삶이 우선이 아니라 의식이 먼저다. 교리에 투철한 성도들이 핍박과 환란의 비바람 속에서도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순교에 던질 수 있었다. 신앙의 의식화의 과정으로써 교리나 신학교육이 없는 부흥은 마치 설계도면 없이 거대한 건축물을 시공하는 것과 같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침체현상은 기초가 부실한 건축구조물과 같다고나 할까? 본인의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역자들이나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인들을 교리에 예속시키면 여러가지 논쟁과 분파를 일으켜 교회의 부흥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교리교육은 기본기와 같다. 멀리 갈 것 없이 얼마전 막을 내린 월드컵축구의 교훈을 새겨 보라. 한국축구는 정신력과 조직력, 그리고 강인한 투지와 열광적인 애국심을 바탕으로 예선을 통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는 비록 벅찬 상대들이긴 하지만 16강 정도는 올라설 것이란 기대로 온 국민이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서 나타난 세계축구의 흐름은 개인기 곧 기본기가 좌우하는 것이었다. 개인의 기본기 없이 선진축구에 도전한다는 것이 허황된 꿈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한 계기였다.


기독교신앙은 교리에서 그 기초를 삼는다.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개념적이고 체계적이며 지성적이며, 객관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하게 만드는 요점들이다. 교리교육의 부재는 「기둥 없는 허술한 집」 또는 「방향을 잃은 배」와 같다. 그것은 마치 뼈 없이 사는 사람과 같은 교인들을 양산할 뿐이다. 교리사적으로 수 많은 신앙고백과 신조와 요리문답이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온 점을 볼 때 교회가 교리교육에 얼마나 힘썼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토록 교리교육의 의<0AA76>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신앙의 기본 지식을 효과적으로 습득하기 위해선 지성적인 호소가 필요하다. 둘째 신앙관의 확립이다. 구원계시를 법적이며 객관적인 진리와 사실로 이해하는 데 분명한 통찰력을 갖게 한다. 요즘 교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성장을 위한 기법이나 프로그램이 다분히 심리적 사회문화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교회의 양적 성장의 유혹은 곧 위기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 이전에 인간의 기존 방식을 성급하게 동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존립의 정당성은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핵심으로 하여 전개되는 영적 싸움으로 입증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동이나 은혜의 분량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질리로 해서 오직 그 명령에 충성하는 종르로서 확고부동한 신앙관을 곧바로 세워야 한다. 셋째 성경해석의 기본 열쇠를 제공한다. 성경은 해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학이나 교리는 필수적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법인데 지금 교인들은 그 영혼의 귀에 어떤 말씀을 듣고 있는가. 넷째 신앙적 삶의 지침을 제공한다. 전통적인 시낭교육서는 루터 칼빈 하이델베르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다. 특히 한국 장로교회는 1963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오리문답서를 신앙생활의 지침서로 채택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들도 교리와 생활 지침서에 대한 교육이 미약한 상태이다. 다섯째 사이비 종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대한 교리적 지식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나 프로그램이 성행한 나머지 정통적인 신앙관이나 교리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써 교회는 그 특유의 영적 힘을 잃고 교인들의 신앙도 소속감이 없으며, 감정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며 출렁이는 요동 속에서 점차적으로 맥 빠지고 해이해지는 영적 기근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리교육의 부재로 인한 병폐는 속히 치유돼야 한다.


제드로의 신앙고백 이후로 그 시대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적으로 표현하는 과제에 부딪치지 않아도 좋은 시대는 결코 없었다. 멜랑톤은 『고백이 없고 교리가 없는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을 갖게 될 위험에 처한다, 고백 속에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확고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신앙고백을 교훈과 증거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앙은 무기력하며 혼란에 빠지기 쉽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물음 앞에 모든 성도들은 확고한 고백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본인은 교리를 중심으로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교인들의 신앙과 그 삶이 고백적이 되도록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또 이런 일련의 목회일정이 교회 부흥의 결실로 나타나는 경험도 한 바 있다.


교회의 부흥이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때다. 그러나 지금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교회성장 내지 부흥의 각종 프로그램이 아무 여과 없이 받아들여지는 현상은 재고돼야 한다. 우리에게는 오늘의 부흥을 일으키는 데 정열을 쏟았던 믿음의 숭고한 선배들과 빛나는 전통이 있음을 상기하자.

남정웅 목사<대전주안에교회>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