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가 일어났다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지식 신념 행위, 이런 것들의 총체를 문화라 한다면 기독교문화란 교회가 공유하는 지식과 신념과 행위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광범위하다. 좀 더 구체화 시켜 보자. 예술이란 다른 표현으로 연결되는 문화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그러니까 좁은 의미에서 문화라고 표현되는 장르들을 우리의 토론 범위로 설정하자. 만약 이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하더라도 너무 멀리는 가지 않기로 하자.
이렇게 정의된 기독교문화를 학생운동과 1947년부터 1997년까지라는 기간에다 연결시켜 보자.
해방전까지의 기독교문화운동사는 성경번역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기독교병원 설립, 기독교언론의 등장, 출판물 보급 등으로 요약된다.(이만열 교수·기독교역사연구소) 역동적인 출발이었다. 아직은 그들의 신앙을 담아내기에 불완전했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았다. 4,50년대 한국전쟁과 서구문화의 유입, 6,70년대 복음주의 학생운동과 교회성장의 시대를 지나면서 기독교문화운동은 새 부대와 새 술을 만들어 낸다. 사람을 키우고 문화를 일궈 낸 시대였다.
찬양문화의 변천은 무엇보다 윤곽이 뚜렷하다. 외국 복음성가들의 번역과 보급이 70년대의 찬양문화를 주도했다. 여기에 학생선교단체들이 개입됐다. 통키타문화의 기독교적 시도들이 나타나고 이것이 찬양전도문화로 자리를 틀었다. CCC가 찬양전도팀들을 가동해 대중전도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예수전도단(YWAM)이 여기에 번역된 찬양곡과 워십댄싱을 곁들여 내놓았다. 교회속의 찬양문화가 기독젊은이들 곧 대중 속에서 숙성되고 다시 전도의 그릇에 담겨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오랜 자기성숙과정을 지나 문화영역으로 진출한 시기다. 87년 '경배와 찬양'운동의 전도자 역시 대학생 선교단체들이었다. 예수전도단 출신의 박종호 최인혁씨 등이 찬양문화를 '예술화'시키며 새롭게 디자인된 찬양문화를 내놓은 것도 이 시기다.
찬양문화의 대중화 작업은 이제 개인에서 민족과 역사 속으로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88년 가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열린 서울대기독인연합의 찬양집회는 복음주의진영 학생들에게 그런 계기를 마련했다. '밀실의 하나님'이 당신의 그 무소부재하심을 회복하고 '광장'으로 나오시려는 의도가 찬양문화 속에 내포되어 나타났다. 이들이 중심이 된 찬양팀 '뜨인돌'은 찬양에다 복음을 담고 이를 민족과 역사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주역으로 평가된다. 96년 활동을 중지할 때까지 그들은 <온세상 주인 되신 하나님>과 <겨레의 십자가> 등을 노래했다.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열매는 찬양문화와 함께 출판문화를 통해서도 다시 전통교회 속으로 들어갔다. IVF는 문서사역의 일환으로 IVP사역을 특화시켰다. 기독교의 지성화 작업은 이러한 문서사역과 함께 제자운동의 바람을 타고 잠자던 한국교회를 깨웠다.
선교단체들이 배출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84년 창간된 월간<빛과소금>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들은 문서, 특히 월간잡지란 그릇에 자신들이 품은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문제를 담아냈다. 판매전략과 신선한 편집내용에 앞서 구성원들의 동질성 마인드는 이 잡지의 색깔을 결정했고 이것이 교회란 새로운 독자시장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빛과소금>은 다시 <목회와 신학> <생명의 말씀> 등으로 번식되며 목회와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영역으로까지 손을 뻗쳤다.
월간<낮은 울타리> 역시 출판을 통해 기독교문화의 지평을 개척한 또 하나의 부류다. 감각적이고 폭력적인 대중문화에 대해 수용자의 입장을 대표해 <낮은 울타리> 거름종이 역할을 해냈다. 대중문화를 향한 반격이었다. 대표인 신상언씨를 비롯해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선교단체들 출신이란 점에서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새 지평이었다.
문서사역은 세계관운동과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IVP가 발간한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송인규지음),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J. 사이더) 등이 그런 역할을 했다. SFC IVF CCC에서 훈련 받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대거 이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들은 저술과 강연으로 땅을 넓혀갔고 전문인들을 양성하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광장'의 역할도 만들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분야를 막론하고 각각의 영역을 기독교세계관이란 프리즘을 통해 재분석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세계는 드디어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입체적인 연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기독 교사의 영역을 만들고, 과학자들과 각 분야의 학자와 전문 직업인들이 제각각 그들의 땅을 개척해냈다. 이런 그룹들이 창조과학회와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기독교학문연구회 등의 연대조직 속에 묶여 역학적 관계로 발전됐다. 한동대학과 연변과학기술대학 안산동산고등학교 수원중앙초등학교 등은 이러한 기독교세계관운동의 결정체들이며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꽃인 셈이다.
다시 예술의 영역에서 기독교미술계가 뒤늦게 복음과 미술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80년대 학원에서 양자의 연결고리를 찾아 고민하던 젊은이들이 90년대 들어 하나의 운동으로 전시장을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 출판문화의 세련미, 세계관운동의 기운이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미술연구회, 기독교현대미술연구회, 엑스오샤 등이 그들의 무대였다. 이 이름을 갖고 그들은 전시회를 개최했고 영성을 키웠다. 친목의 단계를 거쳐 연구와 비평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96년부터는 이들이 또 하나의 종합연대를 목적으로 수련회를 갖는 등 개척의 땀을 뿌리고 있다.
기독교문화의 또 다른 장르들, 연극 영화 방송 등이 여전히 태동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지만 기운은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우물가선교회>와 열린예배를 위한 드라마제작 운동, 기독 찬양운동가들의 방송가 진입, 영상문화를 연구하는 모임의 확산 등은 해산이 곧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태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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