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감격스러운 부활절 아침에 먼저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에 사망의 고통과 죽음의 결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인류
전체가 주는 죄악의 쇠사슬에 매임을 당했습니다.
최후에는 무덤에까지 비하하여 장사지냄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본문에 10여 차례나 기록된 대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또 부활 직
전의 육신, 즉 시체도 썩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육체가 사후에도 썩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비록 그가 우리 죄 값으로 죽으셨으나 육신까지 썩을 필요가 없었
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더러운 인간의 방법을 초월해 이땅에 흠없이 오신 예수님의 몸이
기 때문에 썩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째는 신성을 겸한 육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네째 이유는 성경에 그 육신이 썩지 않는다고 예언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 육신이 부패치 않았다는 것
보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망에 매이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 자신 안에 죽고 사는 권세를 겸전하고 계셨기 때문에
사망에 매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몸에는 신인양성이 있기 때문입
니다. 이 신성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 신성은 성도들 중심
에서 솟아나는 예배와 애모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 안에 계신 그 완전, 존엄
하신 인격으로부터도 예배와 찬송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
을 지닌 육신이 사망의 줄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행하신 칭의의 대 성업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대
사업은 우리 죄인들을 의롭게 만드는 구속사역 입니다. 로마서 4장25절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여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부활은 이처럼 우리의 칭의를 위한 조건입니다. 만일 그가 죽음에
매여 있었다면 그의 구속사업도 매여 있었을 것입니다.
네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본문 27절은 '이는 내 영혼을 음부
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찍이 다윗의
입을 의탁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합니다.
다섯번째 그는 제사장이십니다. 보통 아론의 후손들로써의 제사장들은 다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하신 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7장
16절에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
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사함을 위해 지닌 제사장직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지금도 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죄사함
을 위해 기도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그는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또한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장8절은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라고
예수님 왕권의 영원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수 중 제일인 '죽음'까
지도 통치하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왕이 졸개 같은 사망에 매
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소망이시니 거기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
전서15장20절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가 부활하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의 첫 열매가 되려는데 있습니다. 첫열매 속에는 다시 사는 씨
앗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시면서 우리 속에 다시 사는 씨앗을 주셨
습니다. 거듭나게하는 씨앗입니다. 이보다 더 큰 소망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만
일 주가 그 사망에 매여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절망 외에는 없었을 것입니
다. 이상 예수께서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7가지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가 사망에 결박될 수 없는 이유뿐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천상 어떤 것에도 매여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
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면 이 세상 권력자, 또는 정치가들이나 그외 어떤
것들에 의해서도 결박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맬 수 없었다는 말입니
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수를 결박하려 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대
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캐캐묵은 오류들이 예수님을 결박하려 했습니까.
유대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힘을 다해 진리를 옭아매려 했던가요.
유태교 뿐만이 아닙니다. 또 이방의 종교 만도 아닙니다. 이들이 동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부다처주의 속에 공존하는 이단자들은 '예수와 너희
가 무엇이기에 이 달콤하게 타오르는 육체의 불을 끌 수 있는가. 옳다! 만일
우리가 당세에 살았다면 우리도 저 사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아무리 힘주어
진리를 역설해도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로마, 그리스의 모든 숭배 대
상들, 모든 제도들을 혁명할 줄 아는가'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뭐라 기록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 같이 그의 진리는 이런 것들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또 그의 제자들은
이런 것들의 사상의 뿌리를 뒤집어 놓고 말았습니다. 교회와 신전, 진리와
철학, 기독교와 타종교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의 수다한 지혜라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결박하려고 했습니
다. 이 역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일합니다. 국내외에 수없이 많은
무수한 석학들의 두뇌에는 소위 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도무지 요지부동이라고 하면서 복음을 비웃고 결박하려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심지어는 어떤 신학자들은 자기들 두뇌의 산물인 지혜로써 '하
나님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부활이 없다'는 말과 통합니다. 그
러나 다시 주목할 것은 기독교는 죽음의 결박에 매여 있을 수가 없기 때문
에 인간 위주의 지혜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를 영어로 'Seminary'라 하고 묘지를 'Cemetery'라 하는데 요새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떠드는 신학교를 'Cemetery'라고 부르고 싶습니
다.
셋째는 이 세상 지혜 뿐만 아니라 수다한 무지들이 예수를 결박하려 했습
니다. 이 무지의 극이 당시 백성들의 성경을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한 때
라틴어로 된 성경은 평민은 볼 수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전국
의 성경을 한곳에 모아 불살랐습니다. 성경 가르치는 자들을 투옥했습니다.
이런 짓은 지금도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지들 앞에
별처럼 나타난 위클립, 허스, 제툼, 루터, 멜랑톤, 쥬윙글리 같은 무수한 하
나님의 사람들이 저들과 정면으로 싸워 복음은 매여 있을 수 없음을 증거했
습니다.
넷째는 엄청난 부, 높은 세도 등 시대의 만가지 조류들이 고대로부터 현
대까지 이 진리를 결박하려고 했으나 결코 약동하는 산 진리와 이를 따르는
영혼들을 결박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배울 것은 예수님의 사망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들도
결박할 수가 없었던 것 처럼 예수께 속해 있는 자들 역시 무덤과 사망, 또
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결박당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5장53절의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않을 것을 입겠
고'란 말이나 요한복음 17장4절의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라'라는 말씀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부활절을 통해 보다 많은 성도들의 삶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죄와 사망, 마귀와 죽음의 결박에서 나와 부활의 주님 품에 안길 때까
지 복음의 경주자들로써 부끄러움 없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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