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누군가의 아픔과 어려움에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동정’이고, ‘공감’이다. 어휘가 다양하지 않은 영어에서는 같은 단어(sympathy)다. 거기엔 ‘같음(same)’을 의미하는 접두어(sym)가 붙는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다. ‘많이 힘들겠구나’, ‘어쩌나?’ 등은 누군가의 어려운 상황에 일반적으로 표할 수 있는 태도다. 깊은 속사정을 몰라도 드러난 모습만으로도 동정이나 공감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표현한 후 이내 잊거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해’란 단순히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또 앞으로 이것이 어떻게 풀리거나 진행될지 그 모든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깊이 알다보니 공감과 동정이 오랫동안 유지될 뿐 아니라 그를 위해 뭔가 하고 싶고 또 행동하기도 한다.

이해(理解)라는 한자어는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전적으로는 사람, 상황, 메시지와 같은 추상적이거나 물리적인 물체에 관한 심리학적 프로세스라고 정의한다. 곧 사건의 이유, 원인,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영어에서 ‘이해’(understand)라는 단어는 대상의 아래에 선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진정한 이해는 단순하고 일시적인 동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대를 알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함께 아파하고 그것의 해결책까지 찾아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해하려는 대상의 아래에 서봐야 가능한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아래 서서 섬겨주셨다.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를 이해하셨고, 그 이해는 따뜻했기에 깊은 공감이나 동정이 함께 담겼다.

단순한 논리적 이해나 분석은 차갑게 접근해야 가능하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한걸음 나아가 그의 아픔과 절망, 탄식과 두려움까지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이해.

요즘 외롭고 또 지친 교인들이 많아졌다. 그것을 단순히 아파하는 정도가 아닌 그 사정을 깊이 알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손잡아 일으키라고 주님께서 나를 그들 곁에 세우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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