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유형으로 인정하는 ‘헬렌켈러법’ 제정 중요
밀알복지재단, 통역사 양성과 법·인식 개선 진력

헬렌켈러센터는 지난 3월 24일 시청각장애인 동료상담가 위촉식을 가졌다. 위촉식에 참석한 시청각장애인들이 수어통역사와 촉수화로 행사 내용을 전달받고 있는 모습. 

매년 4월 셋째 주 주일은 장애인주일이다. 장애인주일을 앞두고 장애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복합적인 장애 중 하나인 ‘시청각장애’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시청각장애 극복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A씨는 뇌종양 판정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다. 갑작스럽게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물론,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된 A씨는 깜깜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무서운 기분에 자해를 하다 병원에 실려 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B씨는 선천적으로 청각장애를 가지고 살아오다가 지난해 시야의 일부가 일그러져 보여 안과진료를 받았는데,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았다. 결국 실명하게 될 거라는 진단에 B씨는 절망했지만 곧 실명할 때를 준비해야 했다. 수화와 상대방의 입모양과 제스처를 보며 소통해왔던 B씨는 점자를 배우기 위해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한글 체계를 처음부터 익히면서 동시에 점자를 공부하고, 손으로 상대의 손을 만지며 소통하는 ‘촉수화’를 새롭게 배우는 지난한 시간과 싸우고 있다.

복지의 사각지대 놓인 ‘시청각장애’

헬렌켈러센터 홍유미 팀장이 센터를 소개하는 안내문이자 정기후원 신청서를 보여주고 있다. 

시청각장애라고 하면, 단순하게 시각과 청각 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시청각장애는 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장애의 유형과 양상, 정도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시각장애를 가지고 살다가 청각장애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장애에 적응해 나가는 방식이나 지원이 필요한 영역이 완전히 다르다. 또한 시각장애도 완전히 실명되는 경우와 약시 상태에서 멈추는 경우 등 장애의 정도에 따라서도 다른 대응과 지원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현재 장애인복지법 상에 ‘시청각장애’에 대한 분류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복지법에는 장애 영역이 15개로 분류돼 있다. 그런데 시청각장애는 따로 분류가 없어, 여러 장애 중 ‘주요한 장애’가 무엇인지 따져 장애를 분류하는 형식이다. 가령, 시각장애를 가지고 살다가 청각장애가 새롭게 발생한 경우 시각장애로만 분류된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희귀 난치성 질환으로 분류하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새롭게 발생한 장애, 혹은 갑작스럽게 시청각장애를 가지게 된 경우 적절한 지원은 받을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암이나 교통사고 등 후천적으로 시청각장애를 입은 경우 또한 문제다. 대체로 이들은 갑작스레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다보니, 치료와 재활을 본인이 아닌 가족들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런데 시청각장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마땅한 지원책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지원 받아야 할지 알아볼 여유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다수는 시청각장애를 입은 가족에게 병원 치료와 재활, 그리고 가정에서의 돌봄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현재까지 국내에서는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된 적이 없어 정확한 숫자와 장애의 양상, 실태, 욕구 등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렇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국내 시청각장애인들은 타인과의 의사소통 자체가 어려워 기본적인 일상생활도 영위하기도 어려운 것은 물론, 일할 수 있도록 교육받고 노동 현장에 투입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매일 어두운 벽 안에 갇혀 살고 있다.

헬렌켈러센터 개소식에서 촉수화로 소통하는 시청각장애인 당사자와 수어통역사의 모습.

헬렌켈러센터, ‘소통의 길’을 트다

2019년 4월 밀알복지재단(이사장:홍정길)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시청각장애인들을 찾아내 지원하고, 그들의 자활자립을 목표로 장애 당사자의 특성에 맞는 언어교육을 진행하기 위해 헬렌켈러센터를 설립했다. 

헬렌켈러센터 홍유미 팀장은 “현재 시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언어교육을 하는 곳은 주로 서로 손을 만지면서 수화를 하는 ‘촉수화’를 가르친다”며 “그런데 촉수화는 교재도 없고 교육에 참여할 통역사 또한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서로 손을 맞대고 접촉하는 ‘촉수화’의 특성상 통역사 양성과 교재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올해 안에는 시청각장애인들의 권리 및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할 수 있는 교재를 출간해 보급할 계획이다.

더불어 지난달에는 시청각장애인을 상담하고 언어교육 동참을 도와줄 시청각장애인 동료상담가 3인에 대한 위촉식도 진행했다. 3월 24일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 김지현 씨(52세), 손창환 씨(51세), 윤세웅 씨(47세)를 동료상담가로 위촉해 시청각장애인들이 센터가 진행하는 언어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상담하게 하고, 수어통역사 교육과 인권 인식개선 강사 교육 등을 통해 자활자립을 도울 계획이다.

또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아동을 위한 1:1 촉각치료 가정방문 지원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시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의사소통을 위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촉각치료는 뇌와 손을 자극해 소근육과 대근육을 향상시키고 표현력과 집중력 등을 높여 세상과 교감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지난해 헬렌켈러센터를 통해 촉각치료를 받은 김현준(3세·명) 아동의 어머니는 “시청각장애가 워낙 생소한 장애인 데다 연구자료는커녕 전례조차 없어 아이의 교육에 막막함을 느껴왔기에 해당 치료가 더없이 반갑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두려움에 울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조금씩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보여 감사하다”고 밝혔다.

헬렌켈러센터는 촉각치료 지원사업을 확장해 촉각치료사 양성과정도 실시하고, 해당 치료과정과 결과를 활용해 국내에 전무한 촉각전문치료실을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다. 더불어 시청각장애아동의 부모를 위한 심리치료 및 부모 연대 프로그램 구축 등에도 힘쓸 예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시청각장애인을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인정하는 관련법(소위 ‘헬렌켈러법’) 제정이다. 홍유미 팀장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 혹은 가족들의 장애를 바깥으로 알려서 그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와 연결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교회와 성도들 또한 구역모임을 하거나 가정을 방문할 때 그 가정에 시청각장애인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재활 가능성에 대해 홍보하고 격려하는 동시에,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과 법 개정 운동에도 함께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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