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덕적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75km 해상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20.87㎢, 해안선 길이는 37.6km, 산세가 가파르고 임야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고점은 국수봉(314m)이다. 유인도 8개, 무인도 34개의 섬으로 형성된 덕적군도에는 현재 840가구 1300명의 인구가 산다.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으니, 수도권의 대표적인 섬이라 할 수 있다.
덕적도는 2018년 5월 25일 소야도와 연도되었다. 연결하는 다리 이름은 덕적소야대교이다. 소야도에서는 하루에 두 번 1.3km의 바닷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다. 덕적도에는 솔향기가 가득한 숲길이 일품이며, 노송이 어울려진 해변과 아름다운 백사장이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한다. 여름 휴가철에는 인천시와 관광공사 주최로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인천항 여객터미널과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 두 곳에서 덕적도로 향하는 배편을 이용할 수 있다. 인천에서 덕적도까지는 쾌속선은 50분 정도 걸리지만, 느긋하게 바다여행을 즐기고 싶거나 자전거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차도선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쾌속선은 자전거 탑승을 금지한다.
섬의 이름은 ‘큰물섬’이라는 순 우리말에서 유래했다. 물이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큰물섬’이 한자화하면서 덕물도(德勿島)라 불렸다가, 다시 덕적도(德積島)로 변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서해상의 교통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수군 진지가 세워졌으며 말을 기르는 국영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갯벌이 발달되어 바지락과 굴, 돌김이 많이 나고 해산물 외에 더덕, 산포도가 특산물로 생산된다.
우리나라 섬 중에 가장 오래된 문서기록을 남긴 것이 덕적도이다. 삼국사기와 당서 등에도 중요한 지역으로 표기됐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중국과의 주 교역로가 덕적도를 경유해서 산둥반도로 가는 길이었다. 삼국시대인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와 함께 연합군을 이루어 백제를 침략하려고 9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서해상으로 건너왔다. 당시 신라 태자 김법민이 군선 100척을 이끌고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다.
6·25전쟁 당시에는 면적이 크고 해산물과 식수가 풍부한 덕적도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이곳까지 이념 갈등이 번지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백령도처럼 큰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피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섬 인구가 크게 늘었는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가 대세를 이루었다.
덕적도를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서해낙도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최분도 신부이다. 1932년 미국에서 태어난 최분도 신부는 1976년부터 17년 간 덕적도에서 살면서 병원을 짓는 것을 비롯해 섬 안에 전기 공급, 병원선 운영, 상수도 시설, 양식사업, 간척사업, 고아원을 일으키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요즘 세상에도 혼자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용감하게 감당한 그에게 정부에서 1971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섬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는 것은 개신교이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해상교통편을 많이 이용했다.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를 오가는 뱃길의 길목에 있던 덕적도에는 선교사들이 1901년부터 자주 찾아왔고, 그래서 복음이 급속도로 퍼졌다.
<덕적도사>를 쓴 향토사학자 김광현은 “(덕적도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부녀자까지라도 한글 정도는 해독할 수 있게 됐고, 시대의 변천과 교육의 흐름에 따라 신학문에 유의한 인사들이 규합해 학교를 잇달아 설립했다”고 설명한다. 인하대 최인숙 교수도 인천섬연구총서 ‘덕적도’ 편에서 “마을에 교회를 세울 때마다 학교를 설립해 근대교육을 받게 만들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 유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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