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대청도는 인천시 옹진군 대청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15.60㎢, 해안선 길이 24.7㎞, 최고점은 삼각산(343m)이다. 908가구 1465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항에서 북서쪽으로 약 171㎞, 옹진반도 남서쪽으로 약 40㎞ 거리에 있는, 백령도·소청도와 함께 군사분계선에 근접해 있는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충지이다.

옛날에는 대청도, 소청도, 두 섬을 뭉뚱그려 그냥 청도, 곧 ‘푸른 섬’이라고 불렀다. 대청도는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고려시대에 원나라 황실 황태자까지도 유배를 왔다고 한다. 충렬왕 6년 원제가 황태자 애아역을 대청도로 귀양 보낸 사건이다. 1996년에 발간된 ‘옹진군향리지’에 보면 유배 당시 황태자가 기거한 곳이 내동초등학교 터였다고 한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백령도행 쾌속선을 타고 출항하면 3시간 후 가장 먼저 소청도에 닿고, 이후 15분이 지나면 대청도에 도착한다. 대청도의 관문은 배가 닿는 선진포이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한때 대청도는 서해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다. 대청도 근해에서 잡히는 어종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해왔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고래잡이가 성행했고, 1950~60년대는 조기와 까나리, 1970~80년대는 홍어,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우럭과 볼락 등 활어가 주력 어종이라고 한다. 지금도 선진포항에는 어선들이 대규모 선단을 이루고 있다.

대청도는 부드러운 모래 해수욕장과 빼어난 경관을 뽐내는 환경으로 ‘신이 내린 낙원’이라고도 불린다. 일주도로는 전체 길이가 18km밖에 되지 않지만, 볼거리가 많아서 다 둘러보는데 4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일주도로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상관없다.

먼저 들판과 해안사구가 있는 옥죽동에 가면 우측으로 적송보호림이 나타나고, 그 옆에는 넓다란 모래언덕이 펼쳐져 있다. 서해의 거대한 겨울 파도가 물밀듯이 옥죽동 해변으로 밀려오면서 모래들이 오랜 세월 해변과 산자락에 날려서 쌓인 것이 지금의 모래밭으로 변한 것이다. 모래사막은 꽤나 넓고 높게 분포돼 있는데 길이 1.5km, 폭이1km 정도 언덕을 이룬다. 이 모래언덕에 낙타라도 등장한다면 중동의 사막처럼 착각할 것이다. 실제로 최근에 모조품으로 2쌍의 낙타를 만들어 놓았다.

대청도에서 가장 높은 사당고개(143m)를 넘어가면 사탄동해수욕장이 나온다. ‘사탄’(沙灘)이란 ‘모래여울’이라는 뜻으로 모래가 바람에 실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여울을 가리킨다고 한다. 지금은 모래울마을로 개명을 했지만 예전의 이름은 사탄동이었다. 이 마을의 공공기관과 단체들에 붙은 이름도 덩달아 사탄초등학교, 사탄청년회, 사탄부녀회 등이다. 교회만큼은 ‘사탄교회’라 하지 않고 ‘실로암교회’란 명칭을 쓰고 있다. 사탄이란 단어가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곧바로 기겁하고 마는, 최대의 적대적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만 천주교에서는 사탄동공소라고 부른다.

대청도에서 풍어제나 당제 같은 토속신앙은 예전에 사라졌다. 과거에는 임경업 장군을 모셨다는 장군당과 서낭당, 부군당 등에서 소를 잡아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대청도에는 선진포교회, 내동교회, 옥주포교회, 실로암교회 등 4개 교회가 있다.

섬의 행정중심지에 있는 선진포교회는 1930년에 세워졌다. 1978년부터 박청산 목사가 31년 간이나 목회를 하면서 지역 사회에 정신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박 목사는 원장 자격을 따서 유치원을 운영하였는데, 부모들이 마음 놓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어린이문화센터 역할을 하였다. 부임 당시만 해도 인천에서 배로 10~11시간이나 걸리는 불편한 환경에서 4남매를 키웠다. 여러 번 육지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 고민도 했지만, 낙도 복음화의 사명을 안고 결국 장기목회를 해냈다. 고인이 된 지금도 그 분의 선한 영향력은 섬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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