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분단 상황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도달할 수 있는 최북단인 백령도는 38°선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인천으로부터는 서북쪽으로 191.4㎞ 떨어져 있다. 면적 46.3㎢, 해안선 길이 52.4㎞, 2021년 현재 2988가구 5144명이 살고 있으며, 최근 화동과 사곶 사이 간척지 매립으로 면적이 늘어나 우리나라에서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원래 이름은 곡도이지만,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처럼 생겼다하여 백령도라 불리고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지만 주민 60~70%는 농업에 종사한다. 백령도 사방 300m 이내는 어로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분단 전까지만 해도 고기가 많이 잡혔고, 지금도 주 어종인 홍어가 다량 서식하지만 눈앞에 보면서도 못 잡는 형편이다. 어민들은 성어기만이라도 어로구역을 확장해주길 바라고 있다.

백령도를 오가는 험한 옛길은 예나 지금이나 악명이 높다. 80년대 인천 연안부두와 백령도를 오가는 배는 3일 간격으로 운항하던 경기호와 옹진호였다. 두 배는 같은 날 아침 7시에 양쪽 항구에서 동시 출항했는데, 한쪽 기상이 좋지 않으면 두 배가 동시에 발이 묶였다. 동절기에는 풍랑주의보에 많이 걸리고, 북한 함정들이나 공군기가 근접하여 도발하면 해상에 긴장이 고조되어 여객선은 며칠이고 발이 묶이고 만다. 지금은 쾌속선이 하루 3번씩 인천에서부터 4시간 정도 만에 주파해 도착하기 때문에 많은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는 섬이 되었다.

불과 12~16km 거리인 북한 장산곶은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구축된 백령도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이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가슴 앞의 비수와 같다. 북쪽의 사소한 행동 하나도 놓치지 않는 레이더기지가 분주히 움직인다.

울릉도처럼 백령도에도 기독교인이 많다. 주민의 70~80% 가량이 기독교 신자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20%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실로 엄청난 비율이다. 교회 숫자가 무려 12개에 이른다. 거기에는 백령도 인근 해역이 외부와 접촉이 용이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따라서 초기 기독교 역사에 백령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배경이 작용한다.

조선왕조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중국 육로를 통한 포교가 막히자, 선교사들은 바닷길을 이용해 백령도로 접근했다. 1832년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98년 정부에서 전도와 교회 설립의 제한을 해제하자, 백령도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과 유배인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이 한학 서당에 중화동 교회를 설립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최초 개신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건축자재를 공급받아 1899년 초가 6칸 규모로 첫 예배당을 세웠다. 장로교 선교사로 연희전문학교를 창설한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화동교회 당회장을 맡았으며, 1900년에 섬을 방문하여 설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6·25 당시 북에서 백령도로 넘어온 피난민 대부분도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여전히 주민 대다수가 ‘기독교에 대한 몰입’ 현상을 보이는 데는 지정학적 이유가 있다고 본다. 북한을 코앞에 둔 최북단 접경지역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적극적 구원관과 유일신 사상을 갖춘 기독교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6·25 당시 백령도에서 벌어진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전쟁 발발 후 휴전선이 무너지고 서울이 점령되는 판세에서, 백령도도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섬을 장악한 인민군들은 주민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안심하라며 예배를 허용했다.

실제로 중화동교회 성도들은 피난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석 달 동안 탈 없이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수복 후 궁지에 몰린 인민군들이 무사히 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편을 제공해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육지에서는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와중에, 백령도만은 기독교 복음의 영향력과 주민들의 단결 속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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