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191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강규찬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 세 번째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9년 3월 1일 평양삼일만세운동에 앞장선다. 고종 황제 서거 추모를 위해 평양 6개 교회 3000여 명이 숭덕학교에 모인 자리에서 강규찬 목사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일제에 짓눌린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준비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 삼창. 조만식(1922년·산정현교회 장로)도 이 만세운동을 위해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합류했다. 강규찬은 경성 감옥에, 상해로 망명했던 조만식은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각각 수감된다. 일경의 추적을 피해 집을 떠나야 했던 교인도 있었고, 여러 성도들의 투옥으로 예배 인원이 줄어들 정도였다.

총독부는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인식되던 산정현교회를 철저히 감시했지만, 교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초대 담임목사였던 선교사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이 교회를 돌봐주었다. 30년대 이후에는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하며 주기철 목사의 옥고와 순교, 예배당 폐쇄 등도 견뎌내야 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산정현교회는 2006년 100주년에 일본 선교사를 파송했고, 10년 만에 예배당까지 짓고 일본 크리스천들과 영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 과거를 앓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일본 땅에 하나님 나라를 펼치면서 참 행복하다. 일본교인들은 우리를 만나면 자주 미안함을 표현한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일본과 특별하다.

또 산정현교회는 평양에 대해서도 애틋하다. 거기가 고향이니 그럴 수밖에. 나 역시 그 곳에서 월남하여 고향을 그리다 천국가신 부모님 신앙을 이었으니 정서가 맞닿았다. 그 곳에 다시 예배당을 세우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한다.

기도뿐만 아니라 평양을 비롯한 곳곳을 찾아가고, 길을 열기 위해 참 많이 애써왔다. 일본과는 많이 달라, 하면 할수록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안타깝다. 그래도 놓지 못하는 것은, 거기가 고향이고 또 사명지인 걸 어쩌겠나. 이렇게 우리 교회는 평양과도 특별하다.

누군가는 적대적일 수 있는 그곳들이 특별한 이유는, 주님께서 모자란 우리를 따뜻하게 보신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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