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설교-가상칠언] ① 죄 사함의 은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제가 있는 설교-가상칠언] ① 죄 사함의 은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김미열 목사(원주중부교회)
  • 기독신문
  • 승인 2021.03.0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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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 ‘죄사함의 은혜’ 기억하며 감사합시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김미열 목사(원주중부교회)
김미열 목사(원주중부교회)

자기중심인 세상

노르웨이에 입샌이라고 하는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민극 현대극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을 많이 만들고 공연했던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환자와 상담하기 위해 피터 징크에란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 병원은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수감되어 치료받고 있는 환자들을 상담하였습니다. 그런데 상담하는 중에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분명 환자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거나 생각이 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전혀 이상함이 없었습니다. 분별력도 있고, 논리 있게 이야기를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꿈이 있습니다. 제 소망은 이런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등 이야기를 너무 잘하였습니다. 또 다음 환자를 상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분별력 있게 자기 이야기를 잘 하였습니다. 미래의 꿈 이야기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상담 후에 입샌은 담당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 제가 생각하기에 퇴원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은 오히려 인권 침해인 것 같습니다. 제가 대화해 보니까 그들은 논리적으로 분별력 있게 자기 이야기를 너무 잘 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비전과 소망과 꿈도 이야기하는 데 모두 정상입니다. 왜 그들을 여기에 가둬 두셨습니까?”

그러자 의사가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미친 겁니다.”

그래서 미쳤다니요. 무슨 말입니까?”

정신병원에 입원한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모두 이야기를 잘합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분별력 있게 이야기를 잘하는데, 특징은 모두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겁니다. 나 밖에 모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모르고, 내 가족도 모릅니다. 오직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자기 생각만합니다. 자기 꿈과 자기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왜 함께하지 못하고 왜 함께 살기 어렵냐 하면, 자기만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질환자들의 특징입니다.”

입센은 의사의 이야기를 듣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에 입센은 고백하였습니다. “그렇구나. 여기만 정신병원이 아니라 세상이 정신병원이구나.”

이 시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목회자들도, 심지어 심리학자들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중심입니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족도, 형제도, 이웃도, 사회생활도 자기중심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생활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자기중심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신의 쾌락과 욕망과 이기적인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이탈한 상태를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에서 극단적 자기주의로 세계관과 인생관을 형성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이 중심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이웃을 보며, 함께 하는 가족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옮겨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까? 하나님중심에서 자기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된 그때 범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를 범하여 결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

여러분. 세상을 보며 정말 고민하고 아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의 특징인 자기중심이 가정 속으로, 특별히 교회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조차도 자기중심으로 변한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도 나만 받으면 되고,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중심이 됩니다. 나만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 됩니다. 나만 믿음생활하고 봉사하면 됩니다. 나만 잘 되고, 내 자녀만 잘되면 됩니다. 나만, 내 자녀만 잘되면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오직 ’ ‘’ ‘로 바뀌었습니다. 나 중심의 신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로 전환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종교성은 무엇입니까? 내가 잘되는 것, 다시 말해 내가 복 받는 것을 말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바로 사람들이 이 신앙으로 전락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와 교회를 향해 진단합니다. “소망이 없다.”

정신병원에 왜 소망이 없습니까?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지만 철저히 자기중심이기 때문 아닙니까? 오늘날 이 시대를 향한 평가도 동일합니다. 자기중심으로 변한 세상과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중심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교회도 소망이 없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 시대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교회에, 아니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습니까? 자기중심으로 전락한 상황 가운데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기중심이 될 때, 우리는 그 사회는 결코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아니, 소망이 있다

하지만 저는 반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소망이 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전락하고, 가정과 나아가 믿음의 공동체조차 자기중심이 되어 소망이 없다고 진단할지라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은혜의 역사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였습니다. 한마디로 죄를 사하시는 용서의 은총, 사죄함의 은총을 선포하셨던 겁니다.

소망이 없다고 말하는 곳은 당연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 이 시대에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범죄, 즉 죄악이 이 시대를 삼켰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에서 산출되는 생산물의 결과는 모두 죄악이며, 이기적이고 부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종교인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저들을 사하여 달라는 의미는 내가 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너희를 위하여 피 흘림으로 너희를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너희를 자기중심에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바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돌아가도록 인생관을 변화시켜 다시 복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에 숨겨져 있는 소식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기중심으로 죄를 범하고 있는 세상을 위해 피 흘려 죄를 용서해주니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돌아오라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상에서 주님이 처음으로 하신 저들을 사해 달라고 하신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피 흘려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희는 돌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워 질 수 있다

롤러 메이(Rollo May)가 쓴 <사랑과 의지>(Love and Will)가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희망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다는 데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중심에 빠져 있는 세상 속에서 희망이 되는 무엇인가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해도, 아무리 열심히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가운데서도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 세계, 즉 절망적 무너짐 속에서 새 삶을 추구하는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새 삶을 추구하는 처음 출발 그 자체가 소망이다.” 사람은 소망이 있으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소망이 그에게 추진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을 때 사람은 회복되어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새 삶의 방향은 소망에서 출발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인해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과 좌절과 비극적 삶에 놓여 있는 세상을 모든 사람이 절망적이다. 소망이 없다고 진단하는 세상과 사람과 교회와 종교인을 향해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가 소망이다. 내가 너희 죄악을 위하여, 너희 절망을 위하여, 너희 무너짐을 위하여 내가 내 피를 흘리고 너희를 용서한다.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니 너희는 내게로 와라. 돌아와라!”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길, 그 소망은 주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첫 번째 외침,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6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시면서 일곱 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이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말씀을 가리켜서 우리는 십자가상의 칠언’, 가상칠언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곱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완벽한 은혜에 대한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칠언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이 바로 그 첫 번째 말씀입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절망적 세상에서, 소망이 없다고 하는 세상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오늘의 종교인으로 전락한 그리스도인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소망을 주노라. 내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내 피로 너희 죄를 사하노라. 내가 너희를 용서하노라. 너희는 절망 없는 곳에서 일어나 내게로 돌아오라.”

핵심은 예수님이 소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소망이니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신 그 시대의 사람들, 예를 들어서 예수를 거짓으로 모함해서 고소했던 지도자들, 그 시대의 리더들이 바로 오늘도 자기중심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한 다른 이를 따라 경거망동하였던 그 시대의 군중들, 다른 이의 선동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그 사람들이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한 십자가 근처를 지나가며 이유도 원인도 묻지도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삐쭉거리면서 지나갔던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담당했던 로마 군병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옷을 나누며 웃고 자기들의 이익을 취하던 그 로마 군병들의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기중심에 빠져서 끊임없이 죄를 유발하고, 죄를 생산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일만 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란 말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노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노라. 이 피 흘림으로 너희 죄를 사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죄 사함의 은혜, 용서의 은혜를 베푸노니 돌아오라! 소망을 다른데서 찾지 마라. 나에게로 와서, 내 안에서 소망을 찾으라.”

주께로 돌아오라!

찬송가 91장 후렴에 이와 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이 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슬픔 중에 있는 사람,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져서 더 이상 슬픔을 벗어날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 사함의 은총을 선포함으로써 주님이 소망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마음껏 누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하셨음에도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받지도 누리지도 못하면서 본인은 믿음 생활한다고 착각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실로 믿음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진실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와 죄 사함의 부요한 은혜를 누리면서 감격적으로 예수님을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달으라!

누가 죄 사함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며 예수님을 소망으로 살 수 있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구속의 진리를 깨닫고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구속의 진리를 깨닫고 믿는 사람만이 죄 사함의 은혜의 부요함을 누리고, 감격하며 그 은혜 가운데 예수를 소망으로 삼고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성경 본문을 헬라어로 읽어 보면 파테르, 아페스 아우토이스”(pa,ter( a;fej auvtoi/j)입니다. ‘아페스라고 하는 것은 재고해 주십시오’, ‘풀어주십시오.’ ‘자유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단어는 이제 소망에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생명력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박았습니까? 왜 거짓으로 고소했습니까? 왜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습니까? 왜 조롱을 합니까? 당시 나름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유대인들, 종교인들, 신앙인들이 왜 그렇게 신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비웃게 되었습니까?

한마디로 무식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무식하면 죽는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무식하면 죽습니다. 영적인 무식은 사망을 위해 달려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식하면 망합니다. 영적으로 무식하니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하나님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가는 겁니다. 자기중심으로 갈 때 우리는 다시 소망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다른 지식보다도 구속의 진리를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을 모르는 신앙은 가짜요, 짝퉁입니다. 진실한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 보혈이 없는 신앙, 십자가와 보혈의 감격이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진리를 무시하면 말씀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식하니까, 모르니까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진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은 무엇인가? 내가 왜 교회에 왔는가?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와 있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물음의 핵심은 바로 구속의 진리입니다. 내가 왜 많은 종교, 즉 믿음을 요청하는 것들 중에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예수님이 내 인생에 소망이어야 되는지질문해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이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용서하심의 부요함을 체험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옮겼다는 말은 죄를 범했다는 의미입니다. 범법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그의 형상대로, 그의 아름다운 모습대로 선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함으로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중심의 아름다운 인생이 자기중심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범법자가 된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후로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여 범법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중심에서 사람중심, 자기중심이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자녀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따라 범법자인 우리들은 그에 상응하는 죄의 형벌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구속의 은혜를 붙잡으라

하지만 하나님은 죄의 형벌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대신 죽을 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 우리와 동일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보혈의 대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이외에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서의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누가 회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불가능합니다. 구속의 진리는 오직 예수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다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4:24)

구속의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시고 그의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의로운 백성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대신 값을 치르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것을 바로 구속이라 합니다. 이 구속의 진리를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속의 진리 앞에서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그 보혈을 흘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자기중심의 삶, 즉 더 이상 소망 없는 세상에서 소망 없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여정 가운데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를 다시 결단하게 됩니다. 찬송가 151장 후렴 부분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 참 내 기쁨 한량 없도다

십자가 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이 구속의 진리 앞에서 그 진리를 붙드는 순간, 그 진리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23)라고 말씀하습니다. 진리가 자유하게 한다함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불안으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며, 생명의 부요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죄 사함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감격적으로 주님께 소망을 두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죄와 투쟁하라

죄 사함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죄인임을 인정하며 죄와 투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주님은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라고 고백합니다. 끊임없이 죄악이 나를 둘러 진치고 내 앞에 항상 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죄의 문제는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인정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되면 죄와 투쟁하게 됩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죄와 싸우는 인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죄와 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죄의 포로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와 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죽여야 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언제나 우리 앞에 다가오는 죄와 싸워 반드시 죽이고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욕심을 약화시켜라

그렇다면 어떻게 죄와 투쟁해서 싸워 죄를 죽일 수 있을까요? 죄를 죽이는 게 무엇입니까? 죄를 죽인다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의미는 죄의 경향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를 유발하고 죄를 만들어 내는 경향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겁니다. 죄를 죽이고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죄를 일으키는 경향성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죄의 경향성을 약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약하게 만들어야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약화시켜야 될 죄의 경향성은 무엇입니까?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은 타락함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못된 경향입니다. 욕심은 죄의 습관입니다. 죄로부터 나와 죄를 유발하고 죄를 끄집어내는 경향성이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 앞에 좋은 말을 붙이면 좋은 말이 됩니다. 무슨 욕심입니까? 선한 욕심입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선한 욕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이 다릅니다. 욕심은 욕심일 뿐이지 선한 욕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한 욕심이라는 말로 포장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끝자락에 가보면 죄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죄를 만들어 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습니다(1:15). 왜 가족 간에 죄를 만듭니까? 왜 살인이 일어나고 고소와 고발이 일어납니까? 그 근원은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은 것입니다. 욕심이 시작되면 그 끝자락은 죄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죄의 육체로부터 나오는 정서로 움직이는데 이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경향성이요, 타락의 산물인 욕심을 약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소욕에 민감하게 반응하라

그렇다면 욕심을 어떻게 약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소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가 어쩌다 오래 전에 한 번 들은 말씀이라도 우리 마음에서 끄집어내셔서 우리의 마음에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싸우게 됩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일은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아.’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소욕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죄를 죽이고 죄를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성령에 민감할 때 죄 사함의 은혜의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죄를 죽이는 일이 힘들다. 죄의 경향인 욕심을 약화시키는 일이 힘들다. 성령의 소욕에 민감하게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힘들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힘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를 능히 이기고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소욕에 민감하게 함으로써 욕심을 약화시키고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주님이 용서해 주신 죄 사함의 은혜가 엄청나구나! 무궁무진한 거구나!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시편은 말씀합니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40:12)

우리는 이제 나는 끝났습니다라고 절망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죄를 죽이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 죄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나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사망에서 건져주시고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셨으니 나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죽이는 투쟁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께 민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도 죄의 분량이 줄며, 그 욕심으로 인한 결과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하루를 지나 생각해 보십시오. 욕심에 의해서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소욕에 민감해서 기민하게 대처하며 성령이 들려주는 음성에 반응함으로써 선택해 나가면 욕심이 줄어들고 약화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죄를 덜 짓게 되며, 죄를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죄를 단절하라

죄를 회개하고 인정하며 주님의 은혜로 죄와 투쟁하고 약화시켜 싸워 죄를 죽임에 있어 최종은 바로 단절입니다. 이 단절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내가 늘 행하던 건데 이 일을 못하게 되면 얼마나 힘들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목사님이 50대까지 세상에서 막 살았습니다. 번 돈을 가지고 세상 쾌락을 즐기다가 은혜의 복음을 접한 후 죄 사함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로한 나이에 신학을 시작해 어느덧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이 고백하시기를 내가 그렇게 은혜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 이렇게 목사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토요일에 12시가 넘어 새벽 2, 5시에 축구 경기를 한다고 하면 새벽기도 시간이라 볼 수 없더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더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스포츠 중독입니다. 심지어는 안 본다. 안 본다. 절대 안 본다 하면서도 결국 다시 음란물을 본다는 겁니다. 기막힌 상황이 아닙니까? 우리는 얼마나 죄와 투쟁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단절하는 역사도 체험해야 합니다. 죄를 잘라야 합니다.

쥐 중에 사향뒤쥐(musk rat)가 있습니다. 포유류인데 쥐과에 속합니다. 이 사향뒤쥐는 특이한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덧에 걸려 발이 잡히면 일반적인 쥐는 모두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잡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향뒤쥐는 발이 걸리면 도망가기 위해 자기 입으로 발을 잘라낸다고 합니다. 저는 실제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연구 결과가 그렇다고 합니다. ‘한 발을 잃더라도 나는 살아야겠다. 잘라서라도 살겠다라고 하는 것이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며 이제 믿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이전에 살던 방식과 동일하게 살다가는 죄의 투쟁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죄의 포로로 잡혀서 죄 사함의 무궁무진하고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왜 나는 냉냉하지? 왜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하지?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다는데 왜 나는 그 사랑이 뭔지 모르지?”라고 말하게 됩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도 투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세상이 아닙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유일한 대상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죄를 잘라야 합니다. 단절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삶이 가치 있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죄와 싸워서 죄를 죽여야 합니다. 죄를 남겨 놓으면 안 됩니다.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죽여야 합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육체를 병들게 하는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가 있으면 잘라야 합니다. 왜 못합니까? “죽으면 죽었지 나는 피울 거야. 죽으면 죽었지 나는 마실 거야. 죽으면 죽었지 나는 거기 갈 거야.” 이게 무슨 배짱입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었는데 무슨 말입니까? 죽어도 간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살 수 없습니다. 죽어도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정말 죽게 됩니다.

용서를 실천하라

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부요하게 누리고 오직 예수께 소망을 두고 살 수 있습니까? 그는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용서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언제나 감격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성찬을 베풉니다.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떡을 나누고 주님의 피를 기념하는 잔을 나누며 주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를 실천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우리는 주님을 기념할수록, 기억할수록 은혜의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9)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도 동일하게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시어머니 절대 용서 못해. 나는 남편 절대 용서 못해.” 이런 분은 나는 죄 사함의 은혜를 인정할 수 없어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죄 사함 은혜의 부요함을 누리고 그 은혜 가운데 시작하는 인생이라면 용서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용서 못할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피차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그 용서의 깊이와 넓이를 마음껏 누리며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바로 용서, 서로 용서하라고 합니다. 용서하면 용서받는 사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용서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그 은혜를 힘입어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용서하게 되면, 그 사람의 허물을 덮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11:25).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람이 잘못된 사람을 계속 용서하지 못하고 비판하면 그 사람은 염려 속에 살게 됩니다. 나도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욕을 먹겠구나. 항상 염려하고 사는 것이죠.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연약하고 부족하고 문제가 많아도 다 용서하면 나는 자유합니다. 나도 용서하고 사는데 나도 너처럼 연약할 수 있다. 얼마나 자유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용서하는 사람은 자유를 얻는 거예요. 용서하는 사람은 영혼의 치유를 얻습니다.

잠언은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19: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용서하는 그 사람이 자기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영혼의 치유를 얻으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용서하는 사람은 영혼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어 분을 품고 분노하며 사는 사람은 영혼이 괴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정말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모두 부요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죄 사함의 은혜를 부요하게 체험하는 방식이 됩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1:11) 여기서 전에는이라는 단어와 이제는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십시오. 전에는 용서가 없었는데 이제는 용서하고 났더니 교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교제가 있고 성도와 성도 사이에 교제가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깝게 되었느냐는 말입니다. 교제가 살아 있게 되니 행복이 다가오게 됩니다.

부부가, 가족이 교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 교제의 부요함이 넘치기를 원한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남편을 용서하시고, 아내를 용서하십시오. 이제는 용서해야 합니다. 제발 10년 전 이야기를 끄집어내서는 안 됩니다. 10년이면 세상이 한 번 바뀝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10년 전, 20년 전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됩니다. 자기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같습니다. 주님의 죄 사함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죄 사함으로 그 은혜로 살아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파리에 가면 노틀담 성당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곳 주임 신부님에게 어떤 중년 부인이 찾아 왔답니다. 중년 부인이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신부님, 고해 성사를 하겠습니다.”

커튼이 쳐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말합니다.

누구십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어디어디 사는 이런 여성입니다.”

어떤 죄를 고백하러 왔습니까?”

예 제가 고해 성사를 하고자 하는 것은 제가 큰 죄를 아침마다 범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는 거울을 붙잡고 제가 너무 예뻐서, 너 왜 이렇게 예쁘니, 너 왜 이렇게 이쁘니, 나 같이 생긴 여자 없어 라고 말합니다. 제게 너무 너무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교만이 있습니다. 신부님 제가 너무 예쁜 게 문제입니다. 이것을 회개합니다.”

신부님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커튼을 살며시 걷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살며시 닫고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착각입니다.”

요즘에도 착각하는 성도가 많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되고, 나 아니면 못하고,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나 같이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나 같은 직장인이 어디 있으며, 나 같이 봉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합니다. 착각입니다. 주님이 죄 사함의 은혜로 내가 너를 여기까지 세워 놓았노라 그러니 너도 용서하며 살아라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들을 사해 주옵소서.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소망의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속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날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죽이는 삶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죄의 죄 사함의 은혜를 인정하고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용서하는 가운데 죄 사함의 부요함을 누리시기를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1. 현대 사회의 특징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까? 이 특징이 왜 죄와 연결된다고 생각하십니까?

2. 현대 사회의 절망을 향해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첫 번째 외치신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누구를 향한 외침이었습니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달을 때 얻을 수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5. 우리는 죄와 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6.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실천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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