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한국CE운동 100주년] (3)자랑스러운 CE맨들
[역사기획/ 한국CE운동 100주년] (3)자랑스러운 CE맨들
  • 정재영 기자
  • 승인 2021.02.2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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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겨레 위한 헌신적 발걸음 빛나다

면려운동은 교회와 총회의 울타리에서 전개되어왔지만, 그 활동과 영향력은 시대와 사회 전체에 속속들이 스며들었다. 복음 못지않게 겨레를 소중한 가치로 여겼던 면려회원들의 헌신적 자취는 그리하여 우리 역사 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 13명의 이야기를 간추린다. <편집자 주>

 

김원벽(1894~1928)
승동교회 초대 CE회장/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3·1운동에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기독학생회장으로서 승동교회 예배당 지하에서 학생지도자 회의를 열고 숙의한 후, 3월 1일 강기덕 등과 함께 서울의 만세시위를 지휘했다. 3월 5일에도 다시 학생 중심의 만세행진을 이끌다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와 신생활사·시대일보사 등에서 재직하다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윤재(1888~1943)
마산CE회장/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마산지역 CE를 이끌며 문화운동과 사회계몽운동을 펼치는 한편,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해 편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37년 발생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1943년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대위(1896~1982)
조선CE회장 및 총회면려부 총무 역임/건국훈장 애족장

평안북도 용천 출신으로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탈주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북경대학 재학 중 고려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26년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받다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1927년 귀국한 후 조선기독청년면려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과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은거했다.

함태영(1872~1964)
경기CE 5대 고문/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당시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며, 장로교는 물론 감리교 등 기독교 세력을 규합해 3·1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주동인물로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목사가 되어 연동교회를 담임했고, 192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총회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고문과 심계원장 등을 거쳐, 1953년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기도 했다.

유재한(1901~1963)
경기CE 4대 회장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C. A. 클라크(한국명 곽안련)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동막교회에서 헌신하다 장로가 되었고, 경기노회CE 회장으로 함태영 목사와 함께 면려운동을 열심히 전개했다. 경성노회 초대 서기 등을 역임한 후, 평양신학교 졸업과 함께 목사가 되었다. 이후 양평동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1960년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예장통합 제45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됐다.

이양섭(생몰연대 미상)
조선CE 서기

1930년부터 조선기독청년면려회 서기를 지내던 중, 1937년 5월 전국적인 금주운동을 전개하면서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35개 지역에 발송한 일이 일제에 적발되었다. 이로 인해 이른 바 수양동우회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며 이대위 이용설 정인과 이윤재 등과 함께 검거된다. 이외에는 아직까지 개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신상을 알 수 없다.

강병주(1882-1955)
CE 이사

경북 영주 출신으로 평양신학교 졸업 후 1923년 목사 안수를 받고 풍기교회와 명동제일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계몽운동에도 뜻을 두어 영주 내명교회를 설립했으며, 안동 경안중학교 교장도 지냈다. 1919년에는 3·1운동 참여로, 1938년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각각 투옥되기도 했다. 특히 1932년에는 면려청년회 이사를 지내며, 농촌운동과 사회계몽운동에 힘썼다. 한글보급에도 앞장서 ‘한글목사’라는 별칭도 얻었다.

차경신(1892-1978)
해외 CE운동 전개/건국훈장 애국장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양전백 목사로부터 신앙과 민족의식을 전수받았다. 강계 명신학교, 원산 진성여학교 등에서 교사를 지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9년 도쿄에서 김마리아 등과 함께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국내에 들어와 선천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상해로 피신하여 애국부인단을 이끌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면려청년회를 조직해, 해외동포들에게 신앙과 함께 독립의 소망을 전파했다.

이재인(1907-1964)
의성교회 CE회장/대통령표창

경북 의성 출신으로 의성교회 기독청년면려회(CE) 회장을 지내며, 1935년 부임한 유재기 목사와 함께 CE를 항일운동 단체로 개편했다. 산하에 조사부를 두어 일본 경찰의 상황을 탐사하는 한편, 농촌부와 체육부 활동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종교부를 통해서는 특별기도회를 열어 조국의 독립을 기원했다. 1938년 농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주기철 목사 등과 함께 의성경찰서에서 1년간 옥고를 겪었다.

김태연(1891-1921)
상해한인교회 CE회장/건국훈장 독립장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평양숭실학교 졸업 후, 1919년 만세운동으로 가족을 잃고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 한인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교장직을 맡아 거류민 아동의 교육을 위해 힘썼다. 또한 한인교회 CE회장으로서 면려운동 정신을 선양했고, 독립운동단체인 구국모험단을 조직해 항일 무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서기를 지냈으며, 1921년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간사로 활약하다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김석창(1876-1950)
CE 이사/건국훈장 독립장

평양신학교 졸업 후 선천에서 사역하던 중, 1920년 8월 선천을 방문한 미국 의원단에 독립을 소망하는 진정서 제출을 시도했다. 그해 9월 광복군 결사대원 박의치의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5회 총회장을 지냈으며, 1931년에는 기독청년면려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6·25 전쟁 당시 북로당원에 의해 순교했다.

유재기(1905-1949)
제25회 총회면려부 서기/건국훈장 애족장

경북 영주 출신으로 평양신학교 졸업 후, 조만식과 배민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농촌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총회 차원의 농촌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35년 의성교회에 부임하여 청년면려회(CE)를 중심으로 농촌계몽활동과 민족운동에 힘썼으며, 1936년에는 총회면려부 서기를 지내기도 했다. 이후 대구 침산교회로 옮겨 사역하던 중 농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의성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희염(1885-1950)
세계CE대회 한국대표 및 총회면려부장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캐나다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 후 캐나다로 유학해 토론토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30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CE대회에 안대선 선교사와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해, 조국의 사정을 널리 알리고 해방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후 전국CE 부회장 등을 지낸 후, 제25회 총회부터 30회 총회까지 6차례 연속 총회면려부장으로 섬기며 CE운동 발전에 앞장섰다. 6·25전쟁 중 고문으로 숨졌다.


▒김형곤 장로(김제 대창교회)

기독청장년면려회 전국연합회 제51대 부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총회면려부장으로 섬기고 있다. 한국CE 100주년을 맞아 <눈 속에서 핀 바람꽃>이라는 제목으로 총회회의록과 언론보도 등에 수록된 자료들을 모아 CE운동 기록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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