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한 신앙 무장, 사회 곳곳서 개혁 견인
절제운동 등 민족계몽부터 무료개안·헌혈운동까지 사랑실천과 전도사역 맹활약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면려운동으로 이 땅에서 이룬 수많은 열매들이 있다. 본 지면에서는 이 중, 두고두고 기념할만한 대표적인 사건 혹은 사역들을 일곱 가지 항목으로 구분해 소개한다. 항목 선정과 간략한 내용 소개는 기독청장년면려회전국연합회(전국CE) 제57대 회장을 지내고, 총회신학원 졸업 당시 졸업논문으로 ‘청·장년면려회의 역사와 사업에 관한 연구’를 작성하는 등 CE역사를 꾸준히 연구 중인 모형호 목사(새부안교회)가 담당했다. <편집자 주>

2014년 7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개최된 제27차 세계CE대회 모습.
2014년 7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개최된 제27차 세계CE대회 모습.
모형호 목사(새부안교회)
모형호 목사(새부안교회)

1. 사회 계몽운동

선교 초기,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 신문화를 접한 교회 청년들은 일제의 침탈에 맞서 민족정신을 깨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함을 자각했다. 바로 이런 시기에 면려운동은 신앙을 통한 사회개혁을 목표로 삼고,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대표적으로 3·1운동 이후 청년들은 농촌문제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집중적인 활동을 펼쳤다. 당시 청장년면려회(CE)는 YMCA와 함께 한국기독교연합공의회 산하의 청년회 대표로 구성된 ‘농촌사업협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농촌 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9년부터는 CE 산하에 농촌부를 두기도 했다. 구체적인 사업들로는 토지 및 종자 개량, 지도자 양성, 위생교육, 협동조합 조직, <농민생활> 등 잡지간행, 농사강습회 개최 등이 있다.

2. 물산장려운동 및 금주·금연운동

3·1운동을 전후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 개념을 바꾼 일제는 술, 담배, 아편, 공창(公娼) 등을 동원해 한국 청년들을 도덕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같은 총독부의 움직임에 맞서 교회가 민족계몽에 앞장서 전개한 운동 중 대표적인 것이 ‘절제운동’이다.

먼저 1925년 여자절제회연합회가 결성되어 기관지 <절제>를 통한 문서 계몽을 시작했고,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주도로 매년 1월 15일을 전국 금주운동일로 정하여 본격적인 절제운동을 전개했다. CE에서는 자체 조직에 계독부(戒毒部)를 두어, 가두 선전과 금주강연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며 절제운동에 동참했다. 선천과 재령에서는 수천 명이 가두 홍보에 나서 일대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또한 이와 관련해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자 CE는 장로교단 평양노회, YMCA 등과 연합하여 이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30년 9월 19일 열린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제3회 총회.
1930년 9월 19일 열린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제3회 총회.

3. 기독의용대 십자군

1950년 6월 25일 개시된 인민군의 침략으로 대한민국은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 전선에서 결사항전을 펼치게 됐다. 민족의 비극 앞에 CE회원들은 즉각적으로 구국의 열정을 실행에 옮겼다. 이북에서 면려운동을 이끌다가 월남한 김병섭 장로와 한경직 목사가 주축이 되어 기독의용대 십자군을 창설하자,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십자군에는 그해 8월 말경까지 3000여 명이 참여하며 독립 연대를 구성할 규모를 갖추고, 대구YMCA 강당에서 정식 결성했다. 이들은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를 군가로 지정하여 부르며, 대구서문교회 대구남문교회 대구제일교회 등을 숙영지로 삼고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운동장에서 훈련했다. 아침 6시면 어김없이 기상해 조국수호의 역군이 될 것을 기도했다.

이후 십자군은 일부가 통신학교와 카투사 등으로 배속돼 복무하는 한편, 실제 전투에도 참여해 맹활약을 펼쳤다.

4. 세계CE대회 유치

4년마다 면려운동의 발상지 미국을 비롯해 미주 유럽 아시아를 망라하는 세계CE대회가 열린다. 각국 CE운동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면려운동의 방향을 점검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이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첫 세계CE대회는 1986년 8월 6일부터 9일까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20차 세계대회로, 약 5000여 명의 인원이 참석했다.

이어 한국CE는 2014년 7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정선 하이원리조트에서 제27차 세계CE대회를 다시 한 번 개최하는 쾌거를 거뒀다. 당시 대회는 세계CE 임원 270명을 비롯해 총 1만4000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뤘다.

6·25전쟁 당시 CE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조직된 기독의용대 십자군에 세계기독청년연맹 회장 폴링 박사가 방문해 격려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CE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조직된 기독의용대 십자군에 세계기독청년연맹 회장 폴링 박사가 방문해 격려하고 있다.

5. 전도대회와 하기지도자대회

전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CE회원으로서 최고최상의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모든 회원들이 공유하는 원칙이다. ‘매회원 매년 1인 전도주의자’가 될 것을 결의사항으로 작정하고도 있다. 주일 오후가 되면 교회를 순회하며 헌신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회원들은 예배 전에 먼저 모여 기도한 후, 교회 주변에서 전도했다. 그렇게 전도된 초신자와 함께 헌신예배에 참석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기지도자대회에서도 언제나 전도가 필수 주제로 다루어졌고, 반드시 말씀으로 무장하고 지역에 나가 전도대회를 한 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연히 이 전도대회를 통해 많은 결실들이 있었다.

1924년 12월 2일 피어선성경학교에서 기독청장년면려회조선연합회 창립총회와 함께 개최된 제1회 친선대회가 하기지도자대회의 효시이다. 이후 면려회 친선대회, 4년대회, 하기대회, 청장년대회 등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뀌면서도 이 대회는 2020년 현재 95차까지 이어지며 많은 지도자와 전도요원들을 양성했다. 

6. 단군상 건립 반대운동

교회의 시대적인 요청에 민감한 CE는 단군상을 건립하려는 세력들과 오랫동안 맞서왔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에서는 창간기념 사업으로 단군의 존상을 현상 공모하였으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음을 기사화했으며, 1966년과 1970년 서울과 광주에 단군상을 건립하려다 역시 기독교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이후에도 단군상 건립 시도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특히 찬반세력이 강력하게 맞붙었던 2002년 5월 전국CE 사무실에서는 회원들이 윤번제로 기도회를 열며 뜻을 모았고, 총회 산하교회들을 대상으로 단군상 건립의 심각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7. 무료개안수술과 헌혈운동

CE는 장애인들에 대해,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무료 개안수술 기금조성을 위한 사업을 꾸준히 전개했다. 회기별로 전국을 마라톤으로 달렸고, 자전거 일주가 펼쳐졌다. 특별집회를 열어 회원들의 마음을 모으기도 했다. 불과 몇 만원의 수술비만으로도 광명을 얻는 장애인들을 지켜보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기회와 방법이 얼마든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헌혈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하기지도자대회, 중앙위원회, 전국CE나 로컬CE의 헌신예배 등이 열리기 전에 회원들은 헌혈을 통해 예수사랑을 실천했다. 앞으로도 헌혈운동이 기독교 위상 회복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CE회원들

수양동우회 사건은 CE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대표적 사례이다. 사진은 1931년 열린 수양동우회의 제1회 수양회 모습.
수양동우회 사건은 CE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대표적 사례이다. 사진은 1931년 열린 수양동우회의 제1회 수양회 모습.

그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CE회원들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역사적 사례가 있으니, ‘수양동우회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양동우회란 서울에서 조직된 수양동맹회와 평양에서 조직된 동우구락부가 1926년 1월에 합동하여 결성한 청년모임이다. 1921년에는 국외의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했다. 청년 남녀의 수양을 위한 기관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민족운동단체였다.

이 운동에는 당시 면려회를 관할하던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를 지내고 제24회 총회장까지 역임한 정인과 목사, 마산CE 회장이자 주일학교연합회 회장까지 맡고 있던 이윤재 등 다수의 CE관계자들이 참여했다.

1937년 5월 동우회는 CE의 주도로 전국적인 금주운동을 추진하면서, 당시 CE 서기 이양섭이 책임을 맡아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이라는 인쇄물을 함께 국내외에 배포했다. 일제가 이를 적발하면서 조사가 시작됐고, 수많은 동우회 회원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1년 대부분이 무죄 판결로 풀려나지만, 이윤재 등은 끝내 옥사했다.

최근 <기독청장년면려운동기록집-눈속에서 핀 바람꽃>을 펴낸 현 총회면려부장 김형곤 장로는 수양동우회 사건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38년 기독청년면려회를 사실상 해체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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