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원 목사(효성교회)

윤희원 목사(효성교회)
윤희원 목사(효성교회)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명제가 있다. 일종의 부재증명이라는 말이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는 이 역설이 사실상 동방신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존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논리상으로 쉽다. 그러나 ‘없음이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은 논리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는 존재의 존재증명보다는 존재의 부재증명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있으면 있다는 게 인식되지 않고, 없어야만 비로소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철저히 보이는 것, 드러나는 것을 앞세우고 살았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본질을 아예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 주목하며 살았다. 그 결과 사회는 성과주의에 물들었고, 사람들의 생각과 인식도 실증주의와 결과주의에 매몰되어 버렸다. 사람의 됨됨이도 인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모로, 그래서 외모지상주의가 나타났다. 사실상 형태, 외형이 중요한 것은 노자가 <도덕경>에서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은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은 그릇의 형태가 아니라 그릇 속의 빈 곳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외형이 아니라 그 외형이 드러내고 있는 그 외형 속에 담겨져야 되는 부분인데도 현재 우리는 외형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그릇의 빈 곳을 없애 버렸다. 화려한 예배당도 있고, 화려한 예배의 퍼포먼스도 있지만 보여주기 위한 극장이고, 쇼일 때가 많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도, 비워내야 할 것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 모두가 개혁신앙과 신학을 가진 자라면 가져야 할 신전의식, 즉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하심도, 그 존재함이 드러나게 되는 임재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즉 나의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고 부정하고, 실상 믿지도 않고 믿음으로 산다고 예수님 당시의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살았다.

사람의 안목이란, 육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열리게 된다. 그런데도 우린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다고 믿어,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고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육안이 아닌 심안, 마음의 눈으로만 볼 때 아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화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하였다. 마음에 하나님 사랑하는 믿음 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외형적으로 “주여, 주여”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라고 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계시는 그 임재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 성도는 매 순간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알기에 정직하게 살아간다. 절대로 거짓이나 거짓말로 자기의 삶을 살지 않는다.

만일 단체장을 뽑는 선거에서 내가 단체장이 되기 위해 ‘내가 당선되면’ 하고 걸었던 공약(公約)이 당선된 후에 거짓말이 된 공약(空約)이 되었다면 마키아벨리의 제자이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약해야만 표를 얻을 수 있다는 현실이 정직하게 살지 못하게 한다고 공약(空約)을 공약(公約)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정직한 공약으로 선거에 떨어지고, 정직하게 장사하며 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소망이 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새해에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살기 위해서 무릎꿇는 성도들이, 우리 목사와 장로님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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