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위드 코로나 시대의 목회전략 ②국가의 교회 개입은 합당한가
[특별기고] 위드 코로나 시대의 목회전략 ②국가의 교회 개입은 합당한가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대원 교수)
  • 기독신문
  • 승인 2020.11.17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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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정중한 양해를, 교회는 성숙한 협력을 해야 한다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대원 교수)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대원 교수)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질문하게 된다. ‘국가가 교회의 예배 회집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가’. 바로 정부의 교회 개입은 합당한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감염병 예방과 관리의 책임을 맡은 정부는 성공적으로 ‘K-방역’ 을 하고 있다. 방역당국과 의료진의 노고에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방역은 편파적인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19 전염병 앞에서 교회는 정부의 행정명령이란 것을 받게 되었다. 처음 보는 낯선 용어들로 가득했다. ‘현장 예배 금지’, ‘비대면 예배만 허용’, ‘찬양대 금지’, ‘종교 소모임 금지’, ‘식사 금지’, ‘영상송출인원 20명 이하 참석’, ‘좌석수 30%’, ‘좌석수 50%’, ‘위반시 과태료 300만원 부과’ 등. 이것은 확진자가 나온 교회에 대한 행정명령이 아니다. 한국교회 전체였다. 납득되지 않는 것은 불교 사찰, 천주교 집회는 허용하고 교회만 금지 혹은 제한, 자제케 한 것이다. 이에 목회자와 성도들은 “정부가 교회의 예배까지 모이라, 말라고 할 수 있느냐”, “식당에서 확진자가 나왔다고 모든 식당을 문 닫게 하였느냐”, “몇몇 교회 때문에 정부가 전체 교회 예배를 모이지 말라고 할 수 있느냐”, “이는 방역을 이유로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며 불편해 하고 있다.

사실 이런 질문의 본질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묻는 문제이다. 정말 국가가 교회의 예배 회집과 예배 양식에 대해서 개입하는 것이 합당할까. 전염병 상황에서 국가와 교회는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 합당할까. 한번은 꼭 짚고 넘어갈 주제이다.

교회우선주의 vs. 국가지상주의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는 것인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국가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와 교회는 각각 독립적인가. 교회 역사는 국가와 교회와의 갈등의 역사였다. 중세교회 역사에서 국가와 교회는 두 가지 유형에서 오갔다.

첫째, 교회우선주의 즉 교황절대주의이다. 국가를 교회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 정점이 카놋사의 굴욕(1077)이 아니던가. 교황 그레고리 7세와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가 성직수임권을 놓고 힘을 겨루다가 결국 황제가 추운 겨울 카놋사에 가서 무릎을 꿇어 일단락이 된, 교황절대주의의 꽃이 된 사건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국가 위에 교회가 있다는 중세교회의 입장이었다.

둘째, 국가지상주의 즉 황제교황주의이다. 황제(국왕)가 교회까지 통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논리는 간단하다. 국가가 있기에 교회도 있는 것이 아니냐. 교회를 국가의 일부로 보고 국가가 교회에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중세시대의 역사는 교회우선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진자의 추처럼 반복하면서 교회와 국가가 주도권 다툼으로 부패와 타락의 길로 나아갔다.

분리주의 vs. 독립주의

그렇다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먼저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는 분파가 있었다. 종교개혁시대의 재세례파는 교회와 국가는 상호간섭하지 않는 다른 영역이라는 분리론을 주장했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와 타협 혹은 결합할 때 타락하기에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다. 국가가 영적인 영역에, 반대로 교회가 국가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재세례파는 세속 국가의 일에 무관심했다. 국가의 관리나 공무원이 되려고도 하지 않았고, 국가가 교회를 핍박해도 무력 사용을 반대했다.

하지만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재세례파의 입장에 전적으로 반대했다. 그들은 국가와 교회를 상호 독립적으로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주장은 ‘두 왕국론’에 근거하였다. 즉 하나님이 국가와 교회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하나님이 세우신 국가는 국가대로 세워진 목적을 다해야 하고, 동시에 교회는 교회대로 세워진 목적을 다하면,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독립적 기관이라는 입장이다. 특히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 20장에서 국가의 통치를 다루면서 통치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교회를 보호하며 건전한 교회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는 국가 안에 있지만 교회의 모든 사안은 교회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독립성을 주장했다. 곧 교회의 예배하는 방식도 교회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가 교회의 예배 회집의 여부와 통성기도 금지, 찬양대 금지와 같은 예배와 그 방식에 대한 명령은 잘못된 일임에 분명하다.

다만 이러한 중세와 종교개혁자들의 국가와 교회관은 크리스텐덤 시대, 즉 기독교 국가 시대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통치자들도 교회의 일원으로,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예배를 증진할 의무가 있었다. 정교가 완전히 분리된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정교분리주의

그렇다면 정교가 완전히 분리된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국가와 교회의 형태는 무엇인가. 바로 미국의 ‘정교분리’ 제도이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자유이다. 영국 청교도들이 영국국교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온갖 박해와 차별을 당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교회가 아닌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와 같은 교파들이 차별을 당한 것이다. 이에 칼빈의 교회 독립성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청교도들은 미국에 정착해 종교가 국가에 지배를 받지 않는 정교분리를 통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그 결과 1647년 5월 포츠머스에 모인 4개처 정착지 대표들이 합의한 헌법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와 정치의 분리’(the separation of religion and politics)를 포함했다. 그로부터 150년 후, 13개주의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1791년 12월 15일에 비준된 미국의 수정헌법 1조에서 “연방의회는 어떤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시행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 골자는 ‘종교는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가 아니다. ‘미국의 국교는 ◯◯◯이다’고 정하거나 종교 활동의 자유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국가의 교회 개입이나 신앙의 자유 제한을 금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연방헌법의 정교분리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우리나라도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 제20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항은 ‘국교는 인정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고 정하고 있다.

개입은 불가하나, 전염병 상황을 고려하자

따라서 결론은 분명하다. 국가의 교회의 개입과 예배에 대한 명령은 합당하지 않다. 그것이 헌법의 정신이다. 그리고 교회가 지켜야 할 권리이다. 다만 현재 국가가 코로나19 전염병 재난에 처했다는 점이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전염병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염병 상황에서는 국가가 교회의 예배를 금지하는 명령이 합당한가. 미국의 예를 보자. 지난 5월 18일 노스캐롤나이나주의 로이 쿠퍼 주지사가 야외에서 10명이상 모임을 금지했고, 교회에도 이를 적용했다. 이에 윈스턴 살렘의 베리안침례교회와 그린빌침례교회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제임스 데버 판사는 “미국 헌법이나 수정헌법 제1항의 종교의 자유권 보장은 전염병에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며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역시 전염병 같은 재난의 상황에서도 국가의 교회 개입은 합당하지 않다고 판결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방역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에 명령이 아닌 정중한 양해와 적극적인 협조를 구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교회가 성도와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할 공공성을 가졌는데 국가에 저항하는 것이 합당한가. 물론 저항도 합당하다. 그러나 신중해야 한다. 영국의 청교도 리차드 벡스터가 “만일 정부가 공공의 안전이라는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전염병, 적의 공격, 또는 화재와 같은 필요의 시기에 교회의 회집을 금한다면 순종하는 것이 의무다”고 한 주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염병 재난의 상황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교회가 ‘먼저’, ‘자발적으로’ 그러나 ‘임시적으로’ 예배의 방식을 비대면 온라인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방역이 잘 되어야 교회도 지킬 수 있고, 예배도 보장된다. 따라서 방역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교회는 상호간에 적극적인 협력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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