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청년, 조국과 교회 위해 스스로 생명 던지다
‘대한민국 수호’ 의의에 공감, 자원입대하여 헌신 … 우세현 목사, 전국 돌며 자료 발굴 힘써

무공훈장증. 제30보병연대 육군일등중사 우병옥. 군번 K-1135171.

이렇게 시작되는 한 장의 문서가 우세현 목사(홍은돌산교회)에게는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가보이다. 무공훈장증의 주인공은 우세현 목사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생부이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3개월짜리 아들을 남겨두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후의 나날을 힘겹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 목사에게 어쩌면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아버지가 마냥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이유는 그가 전쟁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신앙적으로도 흠모할만한 유산을 남겨주었고, 그것은 우 목사 가문에 확고한 정체성이 되었다. 우병옥 중사는 바로 6·25 당시 조국과 교회를 위해 스스로 생명을 던진 십자군 출신이었다.

6·25 당시 십자군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십자군동지회’ 회원들이 2002년 11월 1일 함께 촬영한 단체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당시 회장인 우복기 장로,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십자군에 대한 회고록을 남긴 이종배 장로.
6·25 당시 십자군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십자군동지회’ 회원들이 2002년 11월 1일 함께 촬영한 단체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당시 회장인 우복기 장로,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십자군에 대한 회고록을 남긴 이종배 장로.

십자군은 6·25 발발 초기 인민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가 남쪽으로 물러나고, 대구 아래 지역으로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몰려들던 시기인 1950년 7월에 결성됐다.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청년면려회전국연합회(전국CE) 회장이자, 대구에서 피난민들의 교회인 대구성광교회를 섬기던 김병섭 장로가 대한기독교구국단을 이끌던 한경직 목사와 의기투합해 창설한 민간인 의용대의 이름이 ‘십자군’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우리 군의 전세가 현저하게 불리한 상황에서 기독청년들로 구성된 독립적 의용대 구성의 필요성을 당시 국방부 차관 장경근을 만나 설득해 허락을 이끌어냈고, 1개 연대 규모의 전력 편성을 목표로 십자군 모집을 시작했다.

<범어교회 100년사>에는 대구 사월교회, 칠곡교회, 경산교회, 청도 온막교회, 의성 중리교회, 청송 화목교회, 김천 부곡교회 등 각지에서 모여든 지원병들의 실명과 지원동기 등이 도표로 기재되어있다. 범어교회에서는 청년들은 십자군으로,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자원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백악관 종교담당 보좌관과 세계기독청년면려회 총무를 지낸 폴링 박사가 1950년 8월 십자군 의용대원들을 상대로 연설하는 모습.
백악관 종교담당 보좌관과 세계기독청년면려회 총무를 지낸 폴링 박사가 1950년 8월 십자군 의용대원들을 상대로 연설하는 모습.

당시 18세 소년이었던 이종배(훗날 새문안교회 장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청도 온막교회에 전해진 십자군 모집공고를 접한 그는 친척 형 이종숙과 함께 의용대에 자원했다.

자서전 <아름다운 흔적>에서 고 이종배 장로는 “기왕에 군에 가야 할 것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조직하는 십자군에 입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100리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대구서문교회 십자군부대 본부를 찾아가 자원입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십자군 대장을 지낸 고 김병섭 장로가 생전인 2003년에 미국 시애틀의 자택에서 십자군에 관해 증언하는 모습.
십자군 대장을 지낸 고 김병섭 장로가 생전인 2003년에 미국 시애틀의 자택에서 십자군에 관해 증언하는 모습.

지원병들에게는 신체검사를 거친 후 신분증이 발급되었고, 각자 훈련받을 장소가 배속되었다. 이들을 통솔할 지휘부는 전국CE와 대한기독교구국단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됐다. 한경직 목사가 고문, 김병섭 장로가 대장을 각각 맡았으며, 나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1회 총회장을 지낸 황금천 목사가 부대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대 구성에 필요한 3000명을 십자군 이름으로 모집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간인 기독교인으로만 대상을 제한한 데다,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세례교인이어야 하고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까지 충족시키기란 몹시 까다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십자군 지원병들은 대구서문교회, 대구제일교회, 대구남산교회로 분산하여 숙영하며 훈련에 매진했다.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등은 십자군에 훈련장소를 제공했고, 지원병들은 이곳에서 기초군사훈련과 신앙훈련을 매일 반복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8월초 육군본부로부터 십자군에 첫 명령이 하달됐다. 전 병력이 부산으로 이동하라는 내용이었다.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를 힘차게 부르며 열차편으로 이동한 십자군들은 부산진역에 도착해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김천에서 찾아온 여성 십자군들도 이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군 지휘부에서도 십자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달픈 시간들이 기약 없이 흘러갔다. 침구로 지급된 가마니 두 장씩과 하루 한 개씩 지급되는 주먹밥만으로, 부산 서면의 마구간에서 새우잠을 자며 버텨야 했다.

모두가 실의에 빠질 즈음, 뜻밖의 손님이 십자군을 방문했다. 미국 백악관 종교담당 보좌관과 세계기독청년면려회 총무를 지낸 프랜 폴링 박사였다. 십자군 병사들을 한데 모아 연설하며 용기를 북돋아준 폴링 박사는 곧바로 워커 미8군 사령관과 만나 이들의 장래를 논의했다. 결론이 나왔다.

십자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우병옥 중사의 전사통지서와 무공훈장증.
십자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우병옥 중사의 전사통지서와 무공훈장증.

김병섭 장로가 남긴 자필 회고록에는 “워커 사령관은 전투경험이 없는 십자군을 전선에 투입하면 소모전에 희생만 클 뿐이어서, 전선 배치보다는 특수업무에 투입키로” 결정되었고, 그 결과 여러 대원들이 “카투사 부대와 육군통신학교 등으로 분산 입대”했다고 기술되어있다.

비록 당초 목표인 독립 연대 구성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나중에 국군 제9사단 제28연대가 창설되었을 때 전체 부대원 중 80%가 십자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금화전투, 매봉산전투 등에서 적군을 괴멸하며 혁혁한 전과를 남겼지만 다수의 전사자가 나오는 등 희생이 적지 않았다.

우세현 목사의 부친 우병옥은 ‘백마부대’로 알려진 제9사단 30연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1951년 4월 1일 강원도 철원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9월 30일자로 고인에게 수여된 화랑무공훈장, 그리고 향나무를 깎아 만든 장기알과 호신용 육모방망이 등 몇 점 안되는 유품만이 아들의 손에 남겨졌다.

고 우병옥 중사의 아들 우세현 목사가 평생 수집한 십자군 관련 자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 우병옥 중사의 아들 우세현 목사가 평생 수집한 십자군 관련 자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우세현 목사는 아버지가 몸담은 십자군의 주축이었던 전국CE에서 평신도 시절 제46대 회장을 지냈다. 이런 연결고리들을 바탕으로 우 목사는 국내외를 돌며 십자군에 참여했던 증인들을 만나고, 여러 문서와 사진들을 발굴하며 엄청난 양의 자료를 수집했다.

총회역사위원회에서도 6·25 발발 70주년을 기념한 역사저널을 발간하며, 십자군에 관련된 연구논문을 김병희 목사(서변제일교회)가 담당해 완성했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아 세월 속에 묻힐 뻔한 소중한 역사, 십자군이야기는 이제 한국교회 전체의 기억으로 다시 새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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