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대원 교수)

위기의 시대, 교회는 공중보건과 이웃사랑 책임 다해야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대원 교수)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대원 교수)

2020년은 전염병의 해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만국이 전염병에 걸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은 K-방역으로 선방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압제에서도 모여서 예배했고,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모여서 예배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앞에 한국교회는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신천지 집단이 수퍼 전파자가 되면서 한국교회도 제2의 수퍼 전파자처럼 주목 받게 된 것이다.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전염병 앞에서 한국교회는 교회 문을 갑작스럽게 걸어 잠그게 되었다.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 비대면 예배로 드리게 되었다. 당연히 성경공부, 찬양대, 심방 같은 일체의 대면 모임이 중지되었다. 현재는 현장 예배가 일부분 회복되었지만, 목회는 길을 잃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앞에서 교회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길이 시대를 향한 교회다움인가. 우리보다 앞서 경험했던 중세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걸음에서, 교회가 전염병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길을 찾아보자.

‘탓’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구하라

전염병은 하나님의 징계일까? 전염병의 확산은 전염병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전염병에 대한 인식이 그 확산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14세기에서 17세기의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의 원인을 당시 중세 유럽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흑사병은 쥐벼룩으로 옮겨진 바이러스에 확진 되면, 몸에서 열이 나고, 피부가 괴사하면서 검게 변하고, 사흘에서 닷새 만에 피를 토하고 죽은 끔찍한 전염병이었다. 남편도 감염된 아내를 버렸고, 부모도 자식을 버렸다. 유럽 인구의 태반이 죽고, 도시는 시체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14세기의 중세교회는 이런 끔찍한 흑사병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인식했다. 그 시대에는 모든 악한 일을 하나님의 징계로 인식했다.

따라서 당시 유럽인들은 운명론적으로 자신의 죄를 탓하며 하나님의 징계 앞에 체념했다. 병의 치유를 위한 인간적 노력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흑사병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인식은 약 80만명의 채찍질 고행단을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려고 자신의 죄를 탓하며 자신의 육체를 밤낮으로 채찍질을 했다. 이를 회개 행위로 간주했지만, 망가진 몸은 전염병에 취약하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종교주의자들은 흑사병에 대한 희생양으로 1만2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들보다 유대인들의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고, 안식일마다 집안 대청소를 하는 정결예식을 지켜 위생이 깨끗했기에 상대적으로 감염이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우물의 독을 탔다는 가짜 뉴스에 유대인 혐오는 극에 달했고, 극단적인 고행단은 무고한 유대인들을 탓하며 학살했다. 어쩌면 코로나19의 확산 앞에서 서구사회가 동양인들을 탓하며 혐오하고, 한국사회에서 한국교회를 탓하는 혐오의 모습은 중세 유럽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문제는 전염병이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걸린다. 종교개혁자들도 흑사병을 피할 수 없었다.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도 1519년 9월에 흑사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가 살아났다. 그가 죽음을 극복하고 병상에서 일어난 후 작곡한 <흑사병의 노래>(역병가)는 오늘날까지 스위스와 독일 개신교회 찬송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흑사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쯔빙글리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이성주의자였던 그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신앙의 주창자로 변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탓 공세’를 펼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 9:3)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교회는 전염병과 같은 재난 앞에서 죄를 회개하되, ‘탓 공세’로 정죄하고 혐오하기를 그치고, 코로나19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찾아야 한다.

맹목적인 신앙보다 공중보건에 앞장서라

전염병에 맹목적인 신앙은 금물이다. 14세기 흑사병으로 유럽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중세 교회의 지도자들이 전염병 확산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다. 대규모의 종교집회를 개최한 것이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회초리에 대한 전염병을 신앙으로 이겨야 한다며 대규모 종교집회를 열었다. 흑사병은 공기로 전파되고, 타액으로 전파되는 전염병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의학적 사실을 몰랐던 사제들은 좁은 성당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게 했다. 다름 아닌 교회가 수많은 신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확산의 수퍼 전파자가 된 것이다. 교회는 세간에 비방거리가 되었고, 그만큼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흑사병에 대한 교회의 잘못된 대응은 중세교회가 쇠락과 종교개혁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성도와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공중 보건의 책임이 있다. 구약 이스라엘은 전염병을 특별히 관리했다. 전염성이 있는 피부병인 나병(한센병)이 의심되면, 최대 14일을 격리케 하였다(레 13:4~5). 나병환자는 타액이 남에게 전달될 수 있기에 윗입술을 가리라는 지침은 지금의 마스크를 쓰라는 방역수칙과 동일하다 (레 13:43). 이는 공동체를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공중보건조치였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흑사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라고 했다. 병이 났으면 치료해야 하고, 불이 났으면 불을 끄는 일에 힘을 합쳐 하듯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일에 모든 조처를 다 취하게 했다. 그는 흑사병 기본방역수칙을 일인칭을 써서 남이 아니라 자신이 할 일로 제시했다: “1. 나는 연기를 피워 독을 소독할 것인데, 이로써 공기를 깨끗이 정화한다. 2. 나는 병에 필요한 약을 전해주며, 그 약을 먹는다. 3. 나는 오염된 장소와 병든 사람을 멀리한다.” 특별히, 흑사병으로 죽은 시신을 교회 묘지에 매장할 경우, 독(바이러스)이 공기 중에 나올 수 있고 지하수가 오염될 가능성이 있어, 시내 밖 공동묘지를 비텐베르그 시에 제안한 사실은 교회가 예배의 사명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공중 보건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흑사병이 제네바를 뒤덮을 때, 교회만 지키지 않았다. 시민들의 치료를 위해 제네바의 성곽 서편에 구빈원을 운영하여 치료하고, 버려진 고아와 과부들을 섬겼다.

교회는 전염병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염병과 같은 재난의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큼이나 이웃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공중보건에 앞장 설 책임이 있다. 이를 무시했던 중세교회는 영향력을 잃고 쇠락의 길로 들어선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이 보여 준 사랑의 실천이 교회를 신뢰하게 해 결국 부흥을 가져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한국교회는 거울삼아야 한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고, 공중 보건과 이웃 사랑에 앞장서야 한다.

목회 본질 사역에 더욱 집중하라.

전염병이 창궐할 때, 목회 사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치명적인 흑사병이 닥친 종교개혁시대에 목사도 교회와 성도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지, 아닌지는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떼를 돌볼 다른 목회자가 있다면 위험 지역을 떠나는 것도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전염병이 강한 흑사병의 경우 돕는 목사도 함께 죽음을 만날 수 있을 위험이 있었지만, 루터는 영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자들을 피하지 않고 돕고 섬겼다. 쯔빙글리도 위험을 무릎 쓰고 목양하다가 흑사병에 걸리기도 했다. 칼빈도 사랑했던 주변의 동료들이 흑사병으로 죽고 아내도 병으로 죽고 세 자녀도 병으로 잃었지만, 가족을 잃은 아픔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맡겨진 양무리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 헌신했다.

따라서 코로나19 앞에서 교회와 목회자는 전염병을 핑계로 성도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로 인해 성도들의 인생과 가정, 그리고 생업은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목회자는 이러한 때에 더욱 성도들을 영적을 돌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대면하지 않더라도 온라인으로 예배할 수 있다. 화상회의 방식인 줌으로 심방도, 성경공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성도에게 장례가 났는데 전염병의 위험 때문에 조문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 그렇지 않다. 장례가 난 성도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위험하더라도 찾아가야 한다. 천국복음으로 위로해야 한다. 교회는 어느 때보다 본질 사역에 집중해야 한다.

제2의 흑사병이라고 하는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첫째, 누구를 정죄하며 탓하기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구하자. 둘째, 맹목적인 신앙으로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지 말고 기본적인 공중 보건으로 교회를 지키고, 적극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 셋째, 하나님의 양 무리를 맡은 목사는 전염병의 위협 속에서도 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목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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