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방문했을 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끔찍한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가 자행한 집단학살로, 그리고 기아와 질병으로 캄보디아 인구의 1/4인 170만~250만명가량이 사망했다. 이때 죽은 시체들을 2만개 이상 한꺼번에 묻은 집단매장지 ‘킬링필드’는 훗날 크메르 루즈 정권이 세운 민주 캄푸치아가 몰락한 뒤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곳을 떠나면서 일어난 생각 하나를 떨칠 수 없었다. 당시 극적으로 생존한 사람들은 과연 자기 가족을 비참하게 살해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마 6:6~13)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떠올랐다. 사실 주님의 교훈 중에 내 삶에 적용하여 순종하기 가장 힘든 주제가 ‘용서’이다.

용서(아피에미)에 관하여, 누가(눅 17:1~4)는 죄지은 자(하마르타노)를 향한 용서의 과정(범죄→경고→회개→용서)을 보여준다. 마태(마 18:21~35)는 베드로의 질문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는 주님의 대답을 통해 죄보다 용서(아피에미)를 강조한다. 빚진 자를 위한 탕감(아피에미)의 비유에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으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와 반드시 자신의 삶에 적용할 것도 강조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한 사람을 용서하기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히틀러에 의해 학살당한 600만 유대인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박물관에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사야 43장 18절은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용서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교훈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