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태 목사(안동옥동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하며 든든한 동역자가 됩시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이원태 목사(안동옥동교회)
이원태 목사(안동옥동교회)

사람들은 누구나 주목받는 장미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홀로 핀 장미꽃을 보세요. 가시가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안개꽃이 장미의 배경이 되어 줄 때 가시가 숨겨지고 아름다운 축복의 꽃다발이 됩니다. 세상이 삭막한 정글로 변한 이유는 서로 주인공만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고, 버팀목이 되어 줄 때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늘 함께 하는 버팀목입니다. 어려서는 부모가 자식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고, 늙어서는 자식들이 부모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버팀목이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지탱해 주는 기반이나 힘”을 의미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신분으로 볼 때 왕자와 신하의 관계이지만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우정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8장 1절입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다윗과 요나단은 마음이 하나되는 우정으로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는 33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24명은 로마교회 성도들이고, 9명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젊은이도 있었고, 늙은이도 있었습니다. 독신도 있었고, 부부도 있었습니다. 귀족도 있었고, 노예도 있었습니다. 사업가도 있었고 공무원도 있었으며, 유식한 사람도 있었고 무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함께 교회의 일꾼으로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이들은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감사하고 문안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로마서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이 왜 필요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이 복음을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평생을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장에서 왜 많은 사람들에게 문안하면서 편지를 썼을까요? 이는 그들이 바울에게 복음의 일꾼으로 큰 힘이 되어 주었고,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16장을 읽으면서 훗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세상을 위해 수고하는 우리 모습이 버팀목 역할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인생의 버팀목으로 믿어야 합니다.

땅에 있는 버팀목은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도 한계가 있고, 친구도 한계가 있습니다. 명예도 그렇고 권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도, 성공도 진정한 버팀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은 버팀목으로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인생의 버팀목으로 믿어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나의 힘이요 반석이요 요새요 방패요 산성이요 구원의 뿔이신 주님을 내 인생의 버팀목으로 모셔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크신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팀목으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의 버팀목으로 의지했던 학연, 지연, 혈연 등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버팀목으로 삼았을 때 그는 복의 근원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욥도 그러했습니다. 재산이 다 사라지고, 10남매 자녀들이 하루에 다 죽고, 자신의 몸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병까지 들었지만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버팀목으로 의지했습니다.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욥 1:22)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은 상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염려와 불안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마음과 감정과 생각 또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갑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내 인생에 진정한 버팀목이 하나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온전한 길로 우리를 붙들며 이끌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을 인생의 버팀목으로 믿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인생의 버팀목으로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세기에는 편지가 가장 일반적인 의사소통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지막 16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2절에 ‘주 안에서’, 3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7절에 ‘그리스도 안에’, 8절에 ‘주 안에서’, 9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10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12절에 ‘주 안에서’, 13절에 ‘주 안에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은 왜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할까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인생이 주 안에 있느냐, 주 밖에 있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주 밖에 있는 사람이 천국 갔다는 것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주 밖에 있던 사람이 주 안에 들어와서야 천국에 갔다는 것은 읽어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도와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그들을 향하여 주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문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안하라’는 단어도 거의 모든 구절마다 나옵니다. ‘문안하라’는 말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예의를 갖추어서 하는 인사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 안에서 수고했고, 희생했으며,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뵈뵈 같은 사람은 바울의 보호자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기록합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쌍둥이 자매인 것으로 봅니다. ‘드루’라는 이름이 로마식에 의하면 쌍둥이에게 붙이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버시는 아마도 페르시아 출신으로, 로마에서 노예로 일했던 인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버시’의 헬라어 ‘페르시다’는 ‘페르시아 여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외국인들은 출신 지역을 따서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로마나 다른 지역에서 노예나 자유인 여자의 이름으로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버시는 외국인으로 로마에서 노예로 일하다가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 듣고 해방된 여자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감격으로 많이 수고한 버시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16장 22절을 읽어 봅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로마서는 바울이 친필로 쓴 편지가 아닙니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말씀을 더디오가 받아서 쓴 편지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버팀목 같은 사역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대입니다. 내 인생의 진정한 버팀목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하는 삶으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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