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권 목사(한우리교회)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삶은 교회를 세우는 원리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장일권 목사(한우리교회)
장일권 목사(한우리교회)

저명한 인사가 미국 국회에서 연설하면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가 연설할 때는 오히려 침묵하였다고 합니다. 너무도 벅찬 감동의 전율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말로 연설을 맺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자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교단을 이끌어갈 일꾼을 세우는 총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인물을 찾으실까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단락(1:27~2:18)에서, 먼저 건강한 교회를 세우도록 외적·내적인 교회 생활에 대해 권면합니다. 그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인 삶을 모델로 제시하고, 결론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고 하십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자, 신앙생활을 잘하는 자의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이 본문에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삶을 신앙생활과 연결해 이해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해답을 찾으며, 또 좋은 일꾼이 세워지기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본문의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빌 3:20) ‘시민답게 생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빌립보 도시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재건되었기에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로마 시민의식이 대단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시민들의 시민의식과 비교하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금(now)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 충성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사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외적으로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영적인 전투에서 한마음으로 대적하여 승리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서서’(적진에 맞서 대치하는 상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한 팀으로 싸우다), 곧 대적자와 믿음으로 맞서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전쟁터에서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오직 한마음으로 뭉쳐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가 빌립보 교회 환경과 매우 비슷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공권력 개입, 부정적 언론 보도, 이단적인 교회의 비정상적 행동, 세인들의 강한 거부감으로 교회가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도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이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내적인 권면(2:1~4), 성령의 교제, 곧 사랑의 섬김으로 하나가 되는 교회를 세우도록 권합니다(1~2절). 빌립보 교회는 고난의 핍박 중에 있으면서도 내부적 갈등과 반목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2절)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들의 교회가 귀 기울이고 새겨야 할 권면이 아닐까요? 과연 우리의 교회는 외적으로 도전받는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영적인 교회, 내부적으로 겸손하게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로 서 있는지 깊이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오직 성육신적 목회로 하나된 교회가 세워집니다.

김세윤 박사는 <빌립보서 강해>에서 “기독교의 최고 덕목은 사랑과 겸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겸손한 자세를 갖추어야 사랑의 섬김이 가능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기에 사랑의 섬김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 돌보는 겸손의 자세를 갖추어야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된 교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3~4절).

그렇다면 어떻게 겸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론의 중심인 성육신의 낮아지심을 노래하는 위대한 ‘찬송시’입니다(6~8절). 이 말씀은 교리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삶의 원리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의 전통공식’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살펴보면 성육신하실 때의 자세, 성육신하신 목적, 성육신적 삶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①성육신의 자세(6절): 그리스도께서 본질(substance)이 하나님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취하다’(탈취하다·빼앗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피조물인 아담이 하나님과 동등하려는 욕심으로 범죄한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지만(창 3: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이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②성육신의 목적(7절): 본질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본질적으로 종이 되어 섬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모르페)와 종의 ‘형체’(모르페)가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동등하신 주님께서 마음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낮아지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③성육신의 삶(8절):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십자가 죽음을 구속의 관점이 아니라, 주님의 섬김의 극적인 절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본질이 하나님이신데 본질적으로 종이 되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신 주님의 겸손과 사랑의 헌신을 찬양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죽도록 섬기시다가 마지막으로 죗값까지 해결해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곧 온전한 섬김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종이 되어 섬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7절과 8절의 주동사는 ‘비우셨다’(케노오)와 ‘낮추셨다’(타페이노오)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신앙생활은 ‘마음을 비우고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교회 회복의 유일한 길은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 성육신하신 주님처럼 겸손하게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주의 겸손을 본받아 성육신적 목회를 하는 지도자가 꼭 필요한 때입니다.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연구원, 카이스트 교수로 제직했던 김영길 박사는 설립 초기 한동대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계속된 고난이 밀려올 때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빌 2:5~8)을 묵상하며 주님의 낮아지심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고 간증하며, “이 시대에 성육신적인 삶으로 주님의 낮아지심에 동참하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육신적 삶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3~45)

셋째, 교회를 세우는 생활이 성화에 이르는 삶입니다.

본 단락은 마지막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고하며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자, 곧 의롭게 된 자는 성령의 거룩케 하심 따라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성화 구원을 의미합니다.

특이한 점은 성화 구원이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삶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겸손과 사랑의 섬김으로 세워집니다. 겸손과 사랑의 섬김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곧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엡 4: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적인 삶이 교회를 세우는 원리이며, 또 성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입니다.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삶을 적용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화를 이루고, 또 성육신적인 삶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이 시대의 주역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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