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주 안에서’ 사랑하고 서로 하나되어 자라가야 한다

1. 성도 각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따른 성도 서로 간의 교제 

자기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의 영과 믿음에 의해 연합된 모든 성도들은 그의 은혜, 고난, 죽음, 부활, 영광 가운데 그와 사귐을 갖는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 연합되어 그들은 서로의 은사와 은혜 가운데 교제하고 속사람과 겉사람 모두에 있어서 그들 상호간의 선에 도움을 주는 공적이고 사적인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고백으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있어서, 그들 상호간의 건덕을 돌보는 다른 영적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또한 외부적인 것들을 그들의 여러 능력과 필요에 따라 서로 충당해 줌에 있어서 거룩한 사귐과 교제를 유지해야 할 의무에 매인다. 이 교제는 하나님이 기회를 제공하는 대로 모든 곳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로 확장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는 이 교제는 그들이 어떻게든 그의 신격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거나 어떤 면에서든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되도록 하지 않나니 그중 하나라도 그렇다고 하는 것은 불경건하고 모독적이다. 또한 성도로서 그들 서로 간의 교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재화와 소유에 대하여 가지는 권원(權原) 혹은 소유권을 앗아가거나 침해하지 않는다.”(26.1~3)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the communion of saints)는 성도 각자의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성도 서로 간의 교제를 함의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성도 각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바, 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롬 8:9, 고전 6:17, 12:13, 엡 4:4),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시고, 그 안에 살고 거하시며(엡 3:17, 갈 2:20, 요일 3:24, 4:13),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받아(엡 4:7) 그의 마음을 품고(엡 2:5) 그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된다(롬 15:5).

이를 성도와 그리스도의 신비한 연합(unio cum Christo mystica, mystic union with Christ)이라고 칭하며, 여기에 필히 따르는 것이 성도 서로 간의 연합이다. 교회의 지체들은 마치 한 머리에 붙어 있는 손과 발과 모든 기관이 한 몸을 이루어 각각의 기능에 따라 서로 도와 유기적으로 작용하듯(롬 12:4~5, 고전 12:14~27)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힘쓰며,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며,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가난한 자를 돕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형제와 자매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 놓게 된다(행 2:42, 44~46; 히 10:24~25, 살전 5:11, 14, 요일 3:16~18).

칼빈에 따르면 성도의 교제가 참되려면 ‘온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기독교 강요> 4.2.5) 교회에는 ‘수직적으로는’ 진리의 하나됨이 있어야 하며, ‘수평적으로는’ 사랑의 하나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베는 칼날과 같고, 진리가 없는 사랑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다름없다. 진리가 선행(先行)하고 사랑이 후속(後續)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있어서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이 있고 난 후에야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자라갈 수 있다(엡 4:13, 15). 생명의 복음보다 사랑의 윤리를 앞세우는 것은 자기 소견대로 자기만족을 취하는 맹목적 자기애(自己愛)일 따름이다.

성도는 교회를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체로 교회를 이룬다.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바(엡 1:23), 성도의 교제는 그 충만함을 더불어 누림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사랑하고, 떡을 떼며, 서로 하나가 되어 함께 자라가야 한다.

2. 성례의 표징과 성례적 연합

성례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제정된 거룩한 표징과 인호(印號)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을 표상하고, 그의 안에 있는 우리의 권리를 확정하며, 또한 교회에 속한 자들과 나머지 세상에 속한 자들 사이의 가시적 차이를 나타내며, 교회에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직무를 그의 말씀에 따라 엄숙히 종사하도록 한다. 모든 성례에는 표징과 표징된 것 사이에 영적인 관계 혹은 성례적 연합이 있다. 이로부터 전자의 이름들과 효과들이 후자에 돌려지는 일이 일어난다.”(27.1~2)

성례는 말씀 및 기도와 함께 우리의 믿음을 돕는 은혜의 방편이다.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invisible grace, gratia invisibilis)를 보이는 표징(signum visibile, visible sign)으로 제시한다(exhibere, exhibit). 성례의 표징은 마치 인호(sigillum, seal)와 같아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그것에 대한 성도의 믿음을 각인시키고 확증한다.

하나님은 성례 가운데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내심으로 성도가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믿음 가운데 자라가게 하신다. 성례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표할 뿐, 성례 자체가 은혜의 실체는 될 수 없다. 구원의 은혜는 성례 참여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다(창 15:6).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었다(롬 4:11).

성례의 은혜는 성례의 예식 자체가 성례 제정의 말씀에 포함된 약속에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할례로 그 ‘언약의 표징’을 삼으셨다(창 17:9~11). 세례의 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합하여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나 이제는 육신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는 거듭난 삶을(롬 6:3~4, 갈 3:27), 성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을,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을 표한다(고전 10:16).

주님은 다음과 같이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셔서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다. 이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새 생명을 주시고, 새 생활을 주시는, 성도의 살아남과 살아감의 전적인 은혜를 표한다(히 7:22; 8:6, 13).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8:19)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6~28).

3. 성례의 합법적 거행과 효과

올바르게 사용되는 성례, 그것 안에서나 그것에 의해서 제시되는 은혜는 그것 안에 있는 어떤 능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례의 효과는 그것을 거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그것의 사용에 권위를 부여하는 명령과 함께 가치있게 받는 자들에 대한 은총의 약속을 포함하는, 제정의 말씀에 달려있다. 복음 안에서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 의해 제정된 오직 두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이 있다. 이 중 어느 것도 합법적으로 안수된 말씀의 사역자 외에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집행되지 않는다. 구약의 성례들은 그것들에 의해 의미되고 제시된 영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실체에 있어서 신약의 성례들과 동일하다.”(27.3~5)

성례의 거행으로 표징이 의미하는 은혜와 실체가 제시된다. 세례의 표징은 물 혹은 씻음으로서 그 은혜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나는 거듭남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성찬의 표징은 떡과 잔으로서 그 은혜는 거듭난 새 사람으로서 살아감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이다.

성례의 표징과 표징된 것 사이의 관계를 성례적 연합(unio sacramentalis, sacramental union)이라고 한다. 이는 실제적이지만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이지 않고 영적인 바, 그 효과는 표징 자체나 성례 거행자의 능력이 아니라 제정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말씀대로 주님은 성령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푸신다(마 3:11, 요 1:33, 막 1:4, 행 1:5, 22:16). 이는 육의 몸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킴을 받아 새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할례’이다(골 2:11~12). 말씀대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이 없이는 영생이 없다(요 6:53~57). 성찬에 있어서 떡과 잔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현존에 따른 것이므로 성령의 감화로 분별하여 먹고 마셔야 유효하다(고전 11:24~25, 27).

신구약 성례는 그 실체가 그리스도로서 동일하다. 유월절 양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출 12:3~10, 고전 5:7), 광야의 반석의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예표한다(고전 10:3~4). 이 모든 성례는 오직 합법적으로 안수된 말씀의 사역자에 의해서만 거행되어야 한다. 신약시대에 그 권(權)은 오직 목사에게 돌려진다.


※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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