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 남한산성에 오르면 온갖 먹거리가 많다. 순두부가 맛있고 오리백숙에 산채비빔밥 또 도토리묵도 좋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정작 그곳이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현장임은 잊을 때가 많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삼전도의 굴욕’이 일어난 현장이 바로 그곳이다. 인조는 청군을 피해 남한산성에서 버티려했다. 그러나 모든 생필품은 바닥나고 혹한이 계속되니 산성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대안 없는 한계상황에서 불안은 커가고 내부 갈등까지 일어났다. 그 갈등은, 다른 길이 없으니 청군에게 항복을 하여 미래를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결사항쟁을 주장하는 척화파의 대립이었다.

척화파의 대표는 김상헌이고 주화파는 최명길이다. 주화파는 모두 죽기보다는 항복을 하더라도 일단 살아야 내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했고, 척화파는 주화파를 매국노로 비난하며 비굴하게 살기를 거부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할 길은 없었고 혼란만 야기했다.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작성하였지만 김상헌은 그것을 찢어버렸다. 그러나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찢는 사람도, 다시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그것을 다시 붙였다.

이런 갈등 끝에 결국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높이 앉은 청태종에게 들릴 정도였으니 조선왕조 최대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항복 문서를 찢었던 김상헌이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남긴 시조는 애절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최명길 역시 후에 심양으로 끌려가는 등 편치 못했다.

김상헌과 최명길. 나라의 비극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며 대립했지만 두 사람은 결코 사욕을 좇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만은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이 자기 욕심에 얽어 매인 것만이 아니라면 누가 ‘옳고 그르고’가 아닌 그냥 다른 길을 찾는, 그래서 모두 박수 받을 일이리라.

목회든 총회 사역이든 서로 다른 길을 가고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리사욕만 좇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쉬 잠들지 못하는 밤에 역사를 뒤적거리다 보니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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