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명렬 목사(대전남부교회)

믿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찾고 의지합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류명렬 목사(대전남부교회)
류명렬 목사(대전남부교회)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진술합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과 함께 육신의 욕망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겸손과 하나님의 의를 구하심으로 자신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밝힙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니고데모는 당시 30대 무명 청년인 예수를 “랍비”라고 부를 정도로 겸손하며,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니고데모의 동료들은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나무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는 근본적인 결핍과 무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거듭남’에 대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니고데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부족한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거듭남의 의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난다”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고(마 27:51, 약 1:17), 둘째는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갈 4:9). ‘거듭남’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연적인 출생이 아니라 ‘위로부터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을 말씀하셨고, 니고데모는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가지 생명, 즉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구분하였는데, 니고데모에게는 그런 인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전도폭발’의 창시자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이 거듭남의 중요성에 대해서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말은 육체적 출생만 하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체적인 죽음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되고, 육체적 출생과 더불어 거듭난 사람 즉, 영적 출생을 한 사람은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거듭남의 방법-“물과 성령으로”

본문 5절에 보면,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물을 ‘육체의 출생’으로, 성령을 ‘영적인 출생’으로 바라보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물’과 ‘성령’을 대조적으로 봅니다. 특별히 물을 어머니 뱃속에 있는 ‘양수’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물은 철저하게 육체의 출생을 가리키고, 성령은 하나님에 의한 위로부터의 출생 또는 영적인 출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의 장점은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출생과 영적인 출생, 두 가지의 출생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뒤에 이어지는 6절 말씀인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그러나 단점이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상 ‘물과 성령’이 앞에 하나의 전치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 둘이 독립적이고 대조적인 성격보다는 하나의 성격, 같은 성질의 것임을 의미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물’과 ‘성령’을 같이 보는 것입니다. ‘물 곧 성령’이라는 의미입니다. ‘물’은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에 씻어 정결하게 하시는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요, ‘성령’은 씻어 정결하게 하실 뿐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중생의 역사를 감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해석입니다. 칼빈 역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또한 물은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십니다(엡 5:26).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장점은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하시는 희망을 예언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겔 36:25)라고 하셨는데, 이는 성령께서 정결하게 하시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라는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새사람이 되는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를 확증하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거듭남의 신비-예수를 바라볼 때!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 주권적 사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이 어떻게 우리 삶에 일어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이 땅의 생명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우리 존재가 새로워지는 신비는 언제 일어나는지, 그리고 니고데모가 질문한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에 대한 답을 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놋 뱀 사건을 통해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있었을 때에, 저들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해있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민 21장). 그로인해 불 뱀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죽음의 고통과 저주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살 길이 주어졌습니다. 다름 아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놋 뱀을 본 자는 살았고, 거부하는 자들은 다른 길을 가야 했습니다. 눈을 들어 놋 뱀을 보는 자는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눈을 들어 예수를 바라보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권적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단회적인 거듭남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일은 우리의 삶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매순간, 눈을 들어, 의지적으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니고데모처럼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처럼 삶의 모든 것이 깨지고 부서진 밑바닥의 상황에서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모든 것이 막혀 있는 듯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들의 마음은 분주하고 동분서주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눈을 들어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거듭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독자인 우리들에게 강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고”(20절),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21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빛 되신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를 바라보라고 자극합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빛 되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우리 모두 삶의 자리에서 빛과 생명이 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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