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미국 이민 생활 초기에 너무 힘들 때면 밤하늘을 보았다. 별을 바라보고 어머니를 부르며 뒷마당에서 혼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월남전이 한참일 때는 미 육군으로 징집되어 서독에서 근무했는데, 영어로 인해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된 일이 수도 없다.

어느 날 중대장이 나에게 “집에 가고 싶으냐?(Do you want to go home?)”라고 묻기에 클럽에 갈 때마다 불렀던 노래 <I want to go home>이 생각나서 “yes!”라고 했다. 그런데 친구가 그 말은 휴가를 보내주겠다는 게 아니라 ‘제대하겠느냐?’는 뜻이라고 알려줘, 다시 허겁지겁 중대장을 찾아가 ‘I don’t want to go home’이라고 번복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영어로는 집을 ‘house’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home’이라는 개념이 더 강하다. ‘집’이란 삶의 3요소인 ‘의(依) 식(食) 주(住)’ 중의 하나이다. 거기에는 가족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담겨 있어 ‘짓는다’고 표현한다. 어머니께서 바느질로 지어주신 옷과, 땀과 눈물로 지으신 밥(음식)에는 사랑이 쏟아 부어져 있기에 어머니의 손맛은 나이 들어서도 잊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부모형제와 함께 살던 집에서 받았던 사랑을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아무리 초라해도 집(house)은 건물(building)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home)이기에, 사람들은 외롭고 힘들 때면 고향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하셨다.

이 말씀 중에 ‘아버지 집’을 ‘거할 곳’(거처)이라고 비유적으로 사용하셨지만, 이를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궁극적 목적으로 강조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려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고 손양원 목사님께서 순교하시던 날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 한 교인이 와서 울며 손 목사님의 운명 소식을 전하자, 사모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천국에 가셨는데 왜 우느냐?’면서 야단을 치셨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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