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석 목사(광주 중앙장로교회)

시대 향한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 인내하며 이룹시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렘 1:17)

고상석 목사(광주 중앙장로교회)
고상석 목사(광주 중앙장로교회)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외에도 수많은 외침과 6·25전쟁을 거치며, 민주화를 향한 강력한 노력과 더불어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선진국 반열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19로 인하여 난세를 사는 느낌을 받습니다.

역사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보면 하나는 ‘치세(治世)’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난세(亂世)’가 있습니다. 치세란 어려움과 전쟁이 없이 태평성대를 이루고 사는 것을 말하고, 이에 반해서 난세란 내부적인 혼란과 어려움, 또 외부적인 적의 침공으로 난리를 겪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했던 시기도 난세였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난세 중의 난세가 바로 예레미야가 사역했던 시대입니다. 이 가운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했는데, 그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과거 역사를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지만,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는가를 한 번 계산해보면 실감이 조금 날 것입니다. 채 반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시기를 모두가 힘들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레미야가 그 시대에 얼마나 어렵게 사역을 감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난세에 그 많은 고통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주의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에 너무나 힘겨웠겠지만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또는 사명자로서 참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이 있을까요?

1. 기도와 눈물의 신앙생활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기도의 선지자’ 혹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9장 1절 말씀을 보면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도다”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역 중에 늘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현실과 주변을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면 그저 울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조국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을 때는 아예 눈물의 노래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이 노래는 시종 눈물로 가득합니다.(애 1:16) 예레미야는 왜 이렇게 울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이유가 나타난 예레미야 4장 19절을 쉽게 표현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과, 전쟁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서 애곡하는 소리를 미리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좋지 못한 소리를 미리 듣고 알았을 때 그 소리가 그냥 없어져 버리는 소리요, 잘못된 정보라면 차라리 괜찮았겠지만 기어코 현실이 되어 눈앞의 아픔으로 나타났다면 얼마나 선지자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들었던 말씀대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눈물로 선포해야 했습니다.

당시 나라가 어려웠고 위기라고 했지만 누구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경고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역시 ‘오늘 일도 모르는데 무슨 내일이냐’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선지자는 괴로워서 더욱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시대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뼈아픈 것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TV나 스마트폰이나 사람들 말에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감동은 묵살한 채 세상 소리에 좌지우지 되곤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야 하나님의 통치영역인 대자연을 바로 보고, 또한 이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을 바로 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눈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우리도 시대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 고통 가운데 처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릴 줄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12장 15절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세워진 성도들과 주의 종들이 주님의 기쁨과 슬픔을 가슴에 품고 세상 속에서 마땅한 반응을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창조주요 구원자이며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시대적 재난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외면하고 눈물로 기도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더 큰 시대적 재앙임을 기억합시다. 다시 예레미야처럼 눈물 흘리고 애통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깨달아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받은 나이는 20살이었습니다. 이후로 40여 년, 즉 60살이 되도록 난세 중의 난세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그 많은 고통을 끝까지 참고 인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일평생 외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힘든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맞아줄 아내와 가족이 있다면 고생한 것들이 어느 정도 풀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모진 사역의 고통을 홀로 견뎌야 했습니다.

더욱이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메시지를 선포할 때 누군가 말씀을 잘 들어주고 그 편이 되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예레미야는 모든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외면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난 후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고향 사람들마저도 그를 죽이려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말씀 사역을 수행하면서도 격려는 고사하고, 내쫓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2절을 보면 “이에 바스홀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두었더니”라고 합니다. 선지자의 예언이 듣기 싫다며 감옥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중에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이런 지독한 외로움과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예레미야는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나는 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울부짖기도 했습니다.(렘 20:9) 심지어 사역이 너무나 힘들어서 자기가 태어났던 날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렘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10장 19절에서는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쓰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인내한다는 뜻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골고다길도 걸으셨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인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주의 소명과 사명으로 인하여 성령님을 의지하며,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뜻을 돌이켰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 다가온다고 해도 인내하고 또 인내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4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무나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디고 또 견뎌냈습니다. 마치 초대교회의 지도자 야고보가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고 권면한 바와 같습니다. 단순히 환난을 당했을 때 참으라고만 하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무섭고,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자신의 사명이 끝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복음을 외치며, 날마다 인내하고 찬송하며 전진해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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