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의의 완전한 규범’인 율법은 순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1. 도덕법과 십계명 

하나님은 아담에게 행위언약으로서 율법을 주셔서 그것으로서 그와 그의 모든 후손이 인격적이고, 순전하고, 엄밀하고, 영구적인 순종에 매이도록 하셨고, 그것의 성취에는 생명을 약속하시고 그것의 위반에는 죽음을 경고하셨으며,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권능과 재능을 부여하셨다. 이 율법은 그의 타락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의 완전한 규범이었으며 그러한 것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시내 산 위에서 십계명으로 전해졌고 두 판에 기록되었다. 그 첫 번째 네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나머지 여섯은 사람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담고 있다.(19.1~2)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할,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부여되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신령하다(롬 7:12, 14). 율법은 완전하고 순결하고 확실하며, 다 의롭고 진실하여 영원까지 이른다(시 19:7~9). 모든 율법은 십계명에 집약되니, 제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함의하고, 제5-10계명은 ‘이웃 사랑’을 함의한다(출 20:3~17, 신 5:7~21).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여기에 있다(마 22:37~40, 신 6:5, 레 19:18).

율법은 ‘의의 완전한 규범’으로서 ‘인격적이고, 순전하고, 엄밀하고, 영구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게 된다(레 18:5, 갈 3:12). 율법을 행하면 생명과 복이 임하나, 범하면 사망과 저주가 임한다(신 30:19). 다 지키다가 하나라도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약 2:10). 그러므로 율법에 순종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신 5:32).

율법에는 하나님의 뜻과 어떠하심이 동시에 계시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거룩함을 명하시고, 의로우시니 의로움을 명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4).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닮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조건과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징계를 담은 언약을 제정하셨다(창 2:16~17). 최초의 율법이 이 언약으로서 부여되었지만, 아담이 그것을 어김으로 그 반역의 죄가 미쳐(호 6:7) 모든 사람이 사망에 속하고(롬 5:12)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상태에 빠져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시 14:1, 53:1, 롬 3:20, 갈 2:16).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시고 그 가운데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부여하셔서 자기의 백성이 은혜로 율법에 순종하며 살아갈 길을 여셨다(창 15:6, 갈 3:17, 21). 율법 외에 또 다른 의가 나타났으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그것이었다(롬 3:21~22).

2. 의식법과 재판법

하나님은 보통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 외에, 말하자면 미성년기의 교회와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식법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예배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행위, 고난, 은총을 예표하고,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관한 다양한 교훈들을 제시하는 여러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었다. 이제 그 모든 의식법이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말하자면 한 정체(政體)로서 재판법을 주셨다. 그것은 그들의 국가와 함께 기한을 다해서, 이제 그것 가운데 요구되는 일반적 공평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의무로 부과하지 않는다.”(19.3~4)

‘하나님 사랑’의 규범을 담은 제1~4계명에 대한 시행세칙이 의식법이고, ‘이웃 사랑’의 규범을 담은 제5~10계명에 대한 시행세칙이 재판법이다. 의식법과 재판법은 구약 교회에 주어진 율법으로서 그 자체로는 폐지되었으나 그 뜻은 완성되었다.  의식법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모든 규범으로서 절기와 제사에 대한 규례와 정결례가 대표적이다. 이는 장래 일의 그림자일 뿐이니, 그 몸은 그리스도이시다(골 2:17, 히 10:1). 재판법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규례로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공평의 원칙에 기초하나, 그 궁극적인 완성은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데 있다(레 19:18, 약 2:10, 롬 13:18~19). 배상법과 보상법이 대표적이다. 이는 자기 몸을 대속의 제물로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원수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질 때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마 5:44, 48).

3. 거듭난 자들을 위한 율법의 용법

도덕법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것에 영원히 매이게 하는바, 그것 안에 담긴 내용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도 관계된다. 그리스도는 도덕법에 대한 의무를 어떤 식으로도 복음 가운데 해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욱 강화하신다. 설혹 참 신자들은 마치 행위언약 아래에 있듯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거나 정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율법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참 신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하니, 삶의 규범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그들에게 알려주어 그들이 그것에 따라 행하도록 지도하고 그것에 매이게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의 본성, 마음, 삶의 사악한 오염을 깨닫고 그 가운데 자신을 살펴봄으로써 죄에 대한 자각, 죄로 인한 겸손, 죄에 맞서는 미움,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그의 순종의 완전함을 지녀야 할 필요성에 대한 더 한층 분명한 시각에 이를 수 있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거듭난 자들에게도 유익하니, 죄를 금함으로써 그들의 오염을 억제시키고, 율법의 경고는 거듭난 자들이 율법에 경고된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죄가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와 그 죄 때문에 예상되는 이 땅에서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율법의 약속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과 율법의 수행으로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비록 그 은혜가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보여준다. 이러하므로 율법이 선을 앞세워 권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저지한다고 해서 사람이 선울 행하고 악을 삼가는 것이 그가 은혜 아래에 있지 않고 율법 아래에 있다는 증거는 결코 되지 않는다.”(19.5~6)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마 5:17). 그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그는 율법의 의를 다 이루셔서 자기를 믿는 자마다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기꺼이 율법을 행하는 자리에 서게 하신다. 이렇듯 율법주의와 율법폐지가 모두 거부된다.

거듭난 자에게는 ‘믿음의 법’이 작용한다(롬 3:27). 그는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며(롬 6:14~15),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롬 1:17)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하는(요 1:16), 오직 믿음으로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도 의롭다 함을 얻는 삶을 사는바, 그에게는 율법이 언약의 법(lex foederis, the law of the covenant)이자 은혜의 법(lex gratiae, the law of grace)으로서 작용한다. 칼빈은 이를 율법의 제3용법으로서 다루고, 이를 ‘율법의 주요하고 고유한 목적에 가깝다’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2.7.12). 같은 맥락에서,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뜻을 다한 순종’(wiling obedience to God’s will revealed in the law)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체라고 보았다(<기독교 강요>, 3.19.4~6). 이는 야고보 사도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혹은 ‘자유의 율법’이라고 전하는 말씀을 상기시킨다(약 1:26, 2:12).

성도는 여전히 그 속에 곤고함이 남아 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속사람의 마음의 법과 육체에 속한 죄의 법이 날마다 다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잠시라도 그쳐서는 안 된다.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롬 7:22~8:4).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버리거나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말씀은 그대로 받고, 우리 자신을 돌이켜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들 자신은 그냥 두고 말씀에 손을 대었다. 그리하여 지킬만한 율법은 가(加)하여 자기들의 의로 삼고, 지키기 어렵거나 지키기 싫은 것은 감(減)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였다(마 5:19~20).

그러므로 은혜 아래에 있다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며, 은혜 아래에 있으니 오히려 더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롬 6:14~15). 우리가 담대히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그가 들으실 줄 믿기 때문이며(요일 5:14),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믿기 때문이다(히 4:16). 다윗은 이를 율법의 달콤함(suavitas, sweetness)이라고 노래하였다(시 19:10).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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