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 받은 자만이 마지막까지 이긴다

1.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성도의 견인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자기의 영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셔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를 전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상실할 수 없다. 확실히 그들은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堅忍)하고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의 견인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값없고 불변하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택의 작정의 불변성,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의 효과, 그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과 씨의 거주, 은혜언약의 본성에 달렸으니, 이 모든 것으로부터 그 확실성과 무오성이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탄과 세상의 시험들, 그들 안에 남아있는 부패의 횡행, 그들의 보존방편들에 대한 소홀함으로 인하여 심각한 죄에 빠지고 한동안 그 죄에 계속해 머물러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고, 그의 성령을 근심시키며, 그들의 은혜와 위로를 얼마큼 빼앗기게 되며,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그들의 양심이 상처 입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실족시키며, 일시적인 심판들이 그들 자신 위에 임하게 한다.”(17.1~3)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구원의 전(全)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選擇) 의롭다 하시고(稱義) 거룩하게 하시며(聖化) 영화롭게 하신다(榮化)(롬 8:30).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친히 이루신다(빌 1:6; 살전 5:24).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다(사 37:32).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손에서 빼앗을 자 없다(요 10:28~29). 이는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 가운데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렘 32:40) ‘반드시’ ‘영원토록’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며(출 3:12, 요 14:16, 마 28:20) 자기의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벧전 1:5).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신 하나님이(계 22:13)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렘 31:3). 그 사랑으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넉넉히 이긴다(롬 8:37).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롬 8:32) 우리를 그 아들에게 주셔서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흠 없게 보전(保全)되게 하신다(요 17:11, 살전 5:23). 그 아들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요 13:1). 그 누구도 우리를 그 아들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 그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 39).

도르트 신경에 천명되듯이,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에 따른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로 주어진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상태에 놓인 인류 중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속함을 받은 일부만이 이 은혜를 누린다(‘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성도의 견인’은 라틴어로 ‘perse-verantia sanctorum’으로 표기되는 바, 성도가 끝까지 참음을 뜻한다는 점에서는 한자어 ‘堅忍’으로, 그 참음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이끄심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는 한자어 ‘牽引’으로 쓴다. 성도는 인내로 ‘영혼’(목숨)을 얻게 되는 바(눅 21:19), 오래 참음은 은사로서 주어진다(갈 5:22). 오직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자들만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를 짓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긴다(엡 4:30).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씨가 그들 속에 거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요일 3:9).

2. 성령의 역사에 따른 말씀의 내적 증거로 구원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얻음

설혹 위선자들과 중생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호의와 구원의 신분 가운데 있다는 거짓 소망과 육체적 오만으로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이 소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니, 참되게 주 예수를 믿고 신실하게 그를 사랑하며 선한 양심을 다하여 그 앞에서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이생에 확실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이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확실성은 거짓된 소망에 근거한 그저 가상적이고 공연한 감화가 아니라 믿음의 무오한 확신으로서 구원의 약속들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 이 약속들을 맺을 때 지향된 은혜들에 대한 내적 증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양자의 영의 증언에 기초한다. 이 성령은 우리 유업의 보증이시니 그에 의해서 우리가 구속의 날에 인침을 받게 된다. 이 무오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바, 참 신자는 그 확신에 동참하는 자가 될 때까지 오래 기다리고 많은 어려움을 안고 갈등을 겪어야 할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들을 성령에 의해 알 수 있게 됨에 따라 비상적(非常的) 계시가 없어도 통상적(通常的) 방편들을 올바로 사용하여 그 확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소명과 선택을 확신하는 데 부지런함을 다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이로써 그들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의 화평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 가운데, 순종의 의무들을 감당하는 힘과 명랑함 가운데 넓어질 것이다. 이 확신은 그 고유한 열매들이 여기에 있으니, 결코 사람을 방종에 기울게 하지 않는다.”(18.1~3)

구원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복음의 역사(役事)이다(롬 1:17). 성도는 구원의 선물로서 부여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에 이른다. 이러한 ‘믿음의 확실성’(엡 2:8, 벧전 1:5, 7, 9)이 내적으로 새겨질 때, 성도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 주관적 확신(fiducia, assurance)은 객관적 확실성(certitudo, certainty)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오직 보혜사 성령의 역사를 통한 말씀의 감화에 따르며(엡 1:13, 고후 1:22),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시인함에 나타난다(롬 10:10, 17).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자 은혜와 진리의 영으로서(롬 8:9, 요 1:14, 17),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속에 계심과 우리 안에서 말씀하심을 우리가 알고 확증하도록 하시며(요 14:17, 고후 13:3, 5, 요일 4:13),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임을 증언하신다(롬 8:5~17).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고(고전 2:1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과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요일 2:3, 3:24).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믿음의 정서(affectus, affection)이기 때문에, 믿음의 첫 번째 요소가 되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지식에 따른 행위의 열매가 없다면 단지 헛될 뿐이다.

3. 인격과 더불어 선행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짐

참 신자들이라도 자기들의 구원의 확신이, 그것을 보존하는 데 태만함으로써, 양심에 상처를 입히고 성령을 근심시키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져들게 됨으로써, 어떤 돌발적이거나 강력한 유혹에 의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얼굴빛을 거두시고 심지어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조차도 어둠 속을 걷고 빛을 가질 수 없는 고난을 겪도록 하심으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소하며, 단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씨와 믿음의 생명, 그리스도와 형제에 대한 사랑, 마음의 신실함과 의무의 양심이 온전히 결여되지는 않으니, 이것들을 통하여 이 확신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합당에 때에 다시 살아나고, 이것들의 도움으로 그들이 전적인 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18.4)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고백과 경건한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믿음의 본질적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즐거움과 자원하는 심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시 51:12). 하나님이 빛이 되시므로 그 자녀는 엎드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고 흑암 중에 거할지라도 돌이켜 다시 빛에 거하게 된다(시 50:10, 미 7:8).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되지만(non posse peccare, not able to sin)(롬 6:15), 남아 있는 죄의 소욕으로 인하여 곤고함이 없지 않다(롬 7:24).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며 사함과 사랑이 더한다(롬 5:20, 눅 7:47). 하나님의 뜻은 예수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에 있다(살전 4:3, 고전 1:30).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이끄신다. 어떤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어떤 때는 모는 막대기와 지팡이로, 어떤 때는 전갈과 채찍으로 그렇게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신다(벧후 1:11).


※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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