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에 설치된 조형물 ‘그날의 함성’. 유관순 일가를 비롯한 순국열사들의 결연한 항쟁의지를 느낄 수 있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에 설치된 조형물 ‘그날의 함성’. 유관순 일가를 비롯한 순국열사들의 결연한 항쟁의지를 느낄 수 있다.

자유·독립 위한 간절한 기도 불꽃 타오르다
거사 전날 매봉 봉화대서 기도문 남겨…가족의 끔찍한 희생은 영예를 얻어

1919년 3월 13일 서울에서 출발한 경부선 남행열차에는 일단의 소녀들이 몸을 싣고 있었다.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를 전국 각지로 퍼뜨리기 위해서 지방으로 향하는 이화학당의 학생들이었다. 그 무리 속에 유관순도 함께 했다.

옛 아우내장터에 세워진 만세운동기념비에는 1919년 4월 1일의 사건이 절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옛 아우내장터에 세워진 만세운동기념비에는 1919년 4월 1일의 사건이 절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앞서 3월 5일의 서울 시위에서 체포되었던 유관순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붙들려있었다. 이날 구속된 이화학당 학생들의 숫자는 28명이었으나, 선교사들이 경무총감부를 찾아가 학생들을 내놓으라며 압력을 넣어 대부분 석방되었다. 하지만 교사 김독실과 학생 신진심 노예달 유점선 등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그 해 8월까지 옥살이를 한다.

학교로 돌아온 유관순은 마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일제에 의해 휴교령이 내려졌고, 박인덕 신준려 등 만세운동에 동참한 스승들은 연이어 붙들려갔다. 이대로 가만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논의 끝에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기차에 오른 것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 전 수석연구원은 <3·1운동의 얼 유관순>(역사공간)이라는 책에서 이 일행에는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 친구 이정수 김복희 등이 함께 했다고 기록한다. 유예도에게는 별도로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임무까지 비밀리에 부여되었다.

천안에서 하차해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과 유예도는 3월 16일 주일예배를 마친 후 가족과 교우, 마을사람들에게 서울의 소식을 자세히 알리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이들이 병천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아우내장날인 4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병천 만세시위 하루 전 유관순의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기도문을 남긴 매봉 정상. 이곳에 조성된 봉화탑은 우리에게 그날의 기억을 되새겨준다.
병천 만세시위 하루 전 유관순의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기도문을 남긴 매봉 정상. 이곳에 조성된 봉화탑은 우리에게 그날의 기억을 되새겨준다.

지령리가 거사준비의 본부가 됐고, 유관순은 인근 지역을 돌며 연락책 역할을 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짚신을 신은 중년 여인 행색으로 천안 일대는 물론이고 멀리 충남 논산, 충북 청주와 진천까지 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힘을 모았다. 하루 수백리 길을 다니느라 이른 아침 나선 걸음이 이튿날 새벽에야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틈틈이 태극기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이화학당에서 잘못 그린 태극기 소동을 치르며 제대로 배운 태극기를 제작해 힘을 보탰다. 나중에 유관순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판결문에는 당시 열사가 직접 그린 태극기가 압수되어 증거품이 되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마침내 예정된 거사일이 다가왔다. 하루 전인 3월 31일 밤, 매봉을 비롯한 일대 24개 산봉우리에서는 약속된 신호로 봉화가 타올랐다. 당시 매봉의 봉화대에 오른 유관순이 간절히 아뢰었다는 기도문은 천안 독립기념관의 어록비에 ‘소녀 유관순 열사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새겨져있다.

유관순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탑원리 열사의 거리.
유관순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탑원리 열사의 거리.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4월 1일 아우내장터에는 아침부터 장꾼으로 위장한 3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조인원이 선봉에 서서 봉기를 이끌었고, 유관순은 큰 태극기를 들고 뒤에 섰다.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시위규모는 점점 커져 나중에는 6400여 명에 이르렀다.
병천에는 일본인 고야마가 담당하는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이미 충청도 곳곳에서는 3월 중순부터 강경과 청주에서의 횃불시위를 신호탄으로 만세운동이 각 고을에 번져갔다. 천안에서도 20여 곳에서 만세 봉기가 일어났으며, 3월 27일에는 직산 금광의 광부들이 단체 시위를 벌이다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 발생지를 표시하는 부도.
아우내독립만세운동 발생지를 표시하는 부도.

바짝 긴장한 일본 헌병들은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김상헌이 숨졌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이 주재소로 몰려들자 출동한 천안 철도엄호대의 사격으로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 여사, 모자간인 최정철과 김구응 등이 피살됐다. 이날 하루 19명이 죽고, 4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 헌병이 달려들어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유관순 본인도 자신이 들고 있던 태극기의 깃대가 부러지고, 몸에 깊은 부상을 당했다. 이 때 입은 상처는 두고두고 유관순을 괴롭혔다. 약을 써도 낫지 않고, 수감생활 내내 고름이 나 고생했다는 것이 감방동기인 어윤희의 증언이다.

유관순 탄생 100주년과 유관순열사사적지 개관을 기념해 제작한 타임캡슐은 후손들의 손으로 2102년 개봉될 예정이다.
유관순 탄생 100주년과 유관순열사사적지 개관을 기념해 제작한 타임캡슐은 후손들의 손으로 2102년 개봉될 예정이다.

부모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 또한 크게 다친 채 현장을 빠져나온 유관순은 결국 얼마 간의 도피생활 끝에 체포된다. 공주지방법원은 그녀에게 7년형(5년형이라는 주장도 있다)을 선고한다. 아우내장터와 같은 날 일어난 공주의 만세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마저 구속되어 그야말로 일가가 몰락의 위기를 맞는다. 실패였을까. 과연 이들 가족의 항쟁은 바위에다 달걀을 던지는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을까?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패배자인 것처럼 보였던 희생자들은 영예로운 이름을 얻었고,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의 독립은 기어이 이루어졌다. 소녀 유관순의 간절한 기도는 마침내 응답되었다.

천안 유관순 투어 가이드
‘시대의 책무’를 되새기다

유관순이 남긴 짧고도 굵은 흔적들을 찾아가는 여행은 열사의 고향마을인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05번지에 조성된 그녀의 생가에서 시작한다. 아담한 초가를 들여다보면 온 가족이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모습을 재현한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유관순의 가족들이 함께 다니며 신앙을 키운 매봉교회(옛 지령리교회)는 생가 바로 곁에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 동문들의 협력으로 재건되어있다. 예배당 1층 역사관은 애국자 집안인 유관순 일가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함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본의 침탈야욕과 반성 없는 자세를 준엄히 꾸짖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041)564-1813.

천안시 병천면의 ‘유관순 따라 걷기’ 여행안내도.
천안시 병천면의 ‘유관순 따라 걷기’ 여행안내도.

해방 후 유관순의 유족들을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지어준 한옥주택까지 관람을 하고 나면 ‘유관순로’를 따라 탑원리 방향으로 이동한다. 길을 가다보면 유관순의 부모인 유중권 이소제 선생의 합장묘,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선 작은아버지 유중권 선생의 묘소에 들르게 된다.

탑원리에는 천안시가 건설한 유관순열사사적지(www.cheonan.go.kr/yugwansun.do)가 조성되어 있다. 열사의 동상과 기념공원 그리고 추모각 등을 둘러본 후, 기념관으로 향하면 탄생에서 죽음까지 유관순에 관한 모든 것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고인의 서거일자에 맞춰 추모행사와,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전야 봉화제가 거행된다.

사적지의 배경을 이루는 매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열사의 후배들이 쓴 추모시 20여 점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시가 기록된 비석 하나씩을 찬찬히 읽다보면 산 중턱의 유관순 초혼묘를 지나, 아우내만세운동 하루 전 봉기를 알린 봉화대가 나타난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한 어린 소녀의 일사각오를 이곳에서 느껴본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와서 병천 읍내로 향하다보면 ‘열사의 거리’를 지난다. 이곳에서 시대마다 이 땅을 지켜온 애국선열들의 면면을 확인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를 되새긴다.

옛 아우내장터 자리가 있는 병천리 구미산 일대의 사적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운동기념비의 절절한 비문을 읽고 나오는 길에, 인접한 병천우체국에 들러 엽서 한 장을 구입하고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관순스탬프까지 찍어주면 좋은 기념품이 된다.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병천리 288번지에 건립된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이다. 그 날의 함성을 되새기며, 유관순을 비롯한 여러 열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미술작품 10여 점이 만세운동 발생지 표지석과 함께 설치된 이곳에서는 매월 1일 오후 1시에 애국시 낭송회가 열린다.

병천을 떠나기 전 ‘병천순대거리’를 들러 이 지역의 대표 먹을거리인 순댓국과 호두과자를 맛보는 것도 좋다.

병천을 빠져나온 후 목천의 독립기념관(041-560-0114)으로 향해 유관순의 어록비를 확인하고, 다시 천안 시내로 이동해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041-550-0820)에서 유관순에 관한 각종 문서들과 연구결과 등을 살필 수도 있다. 천안시 쌍용동 일봉산사거리에 건립된 유관순 동상은 최종 기점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