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우리의 선행은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의 열매

1. 말씀에 따른 선행은 믿음의 열매이자 증거

선행은 오직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한 말씀에 명령하신 것이지, 말씀의 보장 없이 사람들의 맹목적인 열의에 의해서나 선한 의향을 가장하는 어떤 구실로부터 고안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선행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행해지는바,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이자 증거이다. 이로써 신자들은 자기들의 감사를 드러내고, 자기들의 확신을 강화하며, 자기 형제들의 덕을 세우며, 복음에 대한 고백을 장식하며, 대적들의 입을 막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바,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거룩함에 이르는 자기들의 열매를 맺으며 그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16.1~2)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성도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누린다(롬 4:6). 그 복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진다(엡 2:8).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이자(갈 3:29)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라고 칭함을 받는다(갈 3:7, 9).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오직 믿음 때문이며, 할례의 의식(儀式)이나 이삭을 바친 선행(善行) 때문이 아니다. 할례는 구원의 표로서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일 따름이며(롬 4:11),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의 열매일 따름이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 ‘믿음의 역사’는 새 생명과 새 생활에 모두 미치므로, 필히 ‘사랑의 수고’가 수반된다(살전 1:3, 골 1:4).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전한다(갈 5:6).

구원의 전(全) 과정에 역사하는 참 믿음(fides vera, true faith)은 필히 행함을 수반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죽은 것이다. 영혼이 없는 몸은 육체가 아니라 물체에 불과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람의 일반 성정에 속하는 세상의 믿음에 불과하다(약 2:17, 20, 26). 하나님은 행위를 받으시되, 믿음을 보시고 받으신다. 이 점에서,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때였다는 점을 적시하면서(약 2:21),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선포한다(약 2:22).

루터는 야고보서를 행위 구원을 전한다고 오해하여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업신여겼으나,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오직 은혜, 전적 은혜의 구원의 도에 배치되지 않는바, 그 강조점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열매를 맺는 믿음에 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로서(약 5:11), 한 마음을 품고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후히 베풀어 주신다(약 1:5~8, 17). 믿음으로 행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더해지므로, 온 율법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이라고 칭해진다(약 1:25, 2:10, 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를 동등하게 대해야 하며 행위를 내세워 차별해서는 안 된다(약 2:1).

2.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는 선행

선행을 행하는 그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들이 이를 행할 수 있게 되려면 이미 받은 은혜 외에, 그들 안에서 그들이 자신의 선한 기뻐하심에 따라 원하고 행하도록 하시는 동일하신 성령의 실질적인 영향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마치 성령의 특별한 충동에 근거하지 않으면 어떤 의무도 수행해야 할 필요가 없기라도 하듯이 태만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데 부지런해야 한다.”(16.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받으면 그가 자기 안에 사심을 알고, 그가 가르치고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며, ‘의의 열매’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살게 된다(요 14:20, 26, 벧후 1:8, 빌 1:11, 요 15:8, 롬 6:22). 성도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된다(엡 2:10, 갈 2:20).

선행은 믿음의 열매이자, 믿음을 확정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앎을 확신하게 되고 자기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역사함을 알게 된다(요일 2:3, 5).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빌 2:13).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는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한다(요 15:5).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으려면 오직 주님께 접붙임 받아야 한다(사 5:2).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시 37:27). 여기에서 선포되는 것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열매라는 사실이다. 이에 착념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일점일획도 버림 없이, 모두, 지켜 행하고자 하며(신 12:32, 마 5:19, 28:20),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는다(갈 6:9). 이는 우리가 우리의 자질을 의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는 약속이 따름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나 사람의 계명으로 받지 않고 언약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사 29:13, 마 15:9, 골 2:22).

3. 완전한 선행은 없음

자기의 순종으로 이 삶에 있어서 가능한 최고점에 이르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남기는 일을 하거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행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일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 우리의 최선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사죄나 영생의 공로에 미칠 수 없음은 그것과 다가올 영광 사이의 큰 불균형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간격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유익을 끼칠 수도 없고 우리의 이전 죄에 대한 값을 무를 수도 없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때에도 단지 우리의 의무를 행했을 뿐 무익한 종에 불과하다. 우리의 행위는 그것이 선한 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며, 우리에 의해서 야기되는 한, 너무나 오염되고 수많은 연약함과 불완전함에 혼합되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견딜 수 없다.”(16.4~5)

선행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지만(삼상 15:22),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을 그 무엇도 행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조차도 상실되었다. 모두 치우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롬 3:12, 시 14:1, 51:1). 우리에게는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기는커녕 사망의 값을 무를 능력조차 없다. 우리의 선행은 전적인 은혜의 선물일 따름이다. 삭개오가 토색한 것을 갚은 것도 바울이 빚진 것을 갚은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한 후에라도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 한다(눅 17:10). 살아남에 무능한 우리가 어찌 살아감의 유능을 말할 수 있겠는가?

4. 인격과 더불어 선행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자들의 인격이 받아들여지면서 그들의 선행도 그 안에서 받아들여진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이 땅의 삶에서 전혀 책할 것이나 나무랄 것이 없다고 여기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아들 안에서 그들의 선행을 바라보시고 그것을 비록 많은 약점과 불완전함이 수반되더라도 성실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셔서 상주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행해진 일은 비록 그 내용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선하게 사용되는 것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믿음으로 정결해진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도 아니며, 올바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에 따른 것도 아니며,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진 것도 아니어서, 사악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할 수도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도록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은 더욱 악하며 하나님을 노하게 한다.”(16.6~7)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다(엡 1:4, 6). 선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림에 있다(벧전 2:5). 선행은 은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확정한다. 우리가 울며 씨를 뿌리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은 여호와가 큰 일을 행하셨음을 믿기 때문이다(시 126:2~3, 5~6). 우리의 담대함이 다음 고백에 있다.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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