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일 목사(범어교회)

장영일 목사(범어교회)
장영일 목사(범어교회)

세상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변화를 요구할 때가 있다. 그에 대처 하는 방식을 5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 있다.

하나는 거부하고 떠나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이나 톨스토이의 문화 단죄의 방식이다. 하나는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다. 변화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고 순응하는 태도인데 자유주의자의 모습이다. 하나는 이 둘의 중간자의 입장으로, 순응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태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길이고, 로마가톨릭의 입장이다. 하나는 변화는 곧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필요로 한다고 여기는 역설적인 태도로서 마르틴 루터의 견해이다. 마지막 하나는 세상의 변화를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서 받아들이며,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와 세상을 새롭게 할 기회로 여기는 변혁의 태도인데 존 칼빈의 신학이다.

이 분류는 미국의 리처드 니이버가 <그리스도와 문화>란 책을 통해 논한 지난 2000년 동안 세상 문화에 대처해온 기독교의 ‘문화 유형론’이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논하면서 사회구조의 변혁을 요청하고 있다. 그 요구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하류로 떨어지거나 역사에서 사라질 것을 경고하고 있다. 로봇이 기능공을 대변하고, 인공지능이 과학자와 의료진을 대신하고, 심지어 설교자를 대신하여 탁월한 설교를 만들어 제공함으로 비대면 예배 혹은 영상예배로 전환되어 예배당의 현장과 목회자가 필요치 않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근래 코로나19로 인해 초유의 사태가 전개되면서 학자들이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추론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계속해서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도처에 다양하게 발생하여 인간이 대처할 수 없는 역사로 접어들었다고 절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코로나19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태도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유형은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해답은 아니다. 그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온 반(anti-thesse)에 대응하면서 나름 합(syn-thesse)을 이루어 역사의 진보에 그 일익을 담당해왔다. 그 다양성 자체가 인류의 문화의 다양성으로 혹은 전통의 다양성으로 자리 매김을 했다. 그것이 합하여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당신의 대응 유형은 무엇인가? 도피인가? 수용인가? 아니면 중립인가? 중립에서도 아퀴나스, 루터, 칼빈 어느 것을 선호하는가? 이럴 때 질문을 당하는 것은 “성경의 입장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불행히도 성경의 입장은 이 다섯 가지의 길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수도자들도 심지어 자유주의자도 성경에서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론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단지 성경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선포한다(롬 11:36).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Changing World, Eternal Word) 우리 그리스도인의 길로 여기고, 그 길을 따라 겸손히 사랑하며 살아가면 주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성경을 더 오래 붙잡고 날마다 묵상해야 한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 1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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