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기획/70프로젝트, 또 같이 우리] ②70년, 6월에서 6월까지

전남 영광 염산교회의 6·25전쟁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77인 순교기념비.
전남 영광 염산교회의 6·25전쟁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77인 순교기념비.

전라도 소녀의 죽음
아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시원한 파도가 출렁이고 짱뚱어가 펄떡이는 바닷가로 향하는 걸음이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총칼과 죽창을 손에 쥔 채 자신들을 끌고 가는 어른들의 눈에는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독기가 가득 서려있었다.

1950년 10월 어느 날, 전남 영광군 염산면의 설도항에는 동생을 등에 업은 채 인민군과 좌익들의 손에 끌려가는 어린 소녀 옥자가 있었다. 죄목은 단순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반동분자라는 것이었다. 이미 동네 일대에서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들은 죄 없는 어린 목숨들마저 살려두지 못했다.

업힌 동생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옥자에게는 본인이 겪는 소스라치는 공포보다도 당장 언니로서 동생을 달래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컸다. “울지 마, 울지 마. 우리는 지금 천국으로 가는 길이야.”

바닷물이 드나드는 깊은 웅덩이 부근에 도착하자 다른 사람들처럼 옥자의 목에도 무거운 돌이 메어졌다. 최후의 순간을 직감한 누군가가 부르는 찬송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익숙한 가사와 음정이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윽고 차례가 되었다. 옥자와 동생의 몸은 그대로 물에 던져졌다.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옥자가 다니던 염산교회 마당에는 커다란 무덤이 생겼다. 함께 숨진 이들을 합장한 묘소였다. 김방호 목사의 일가족 9명, 허상 장로 부부, 노병재 집사의 가족과 친척 22명 등 무려 77인이 차례로 숨지며 ‘순교자’라는 이름을 얻게 됐고, 옥자와 동생의 짧은 생애는 그 속에 함께 묻혔다. 이웃동네 야월에서도 65명이 같은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1998년 순교공원이 조성되고, 지금은 묘역과 당시 불타버렸던 교회당까지 복원하며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라는 명예를 얻고 있지만 한동안 이들의 죽음은 함부로 이야기하기조차 어려웠다. 잊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예들이 한 지역에 살아가면서 존재하는 불편함도 적잖이 작용했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의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집단 묘소. 학살의 고통과 분노가 한쪽만의 책임이 아닌 것을 보여준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의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집단 묘소. 학살의 고통과 분노가 한쪽만의 책임이 아닌 것을 보여준다.

학살된 경상도 소년
아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왜 군인들이 자신과 가족 친구들을 무섭게 다그치며 학교에 가두었다가, 또 깊은 야산으로 끌고 갔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적군에게 향해야 할 총부리를 왜 자신들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재주, 1946년 10월 16일 생, 1951년 2월 11일 졸. 만 다섯 살도 채우지 못하고 스러진 생명의 묘비를 장식하는 건 불과 20여 개의 글자와 숫자가 전부이다. 재주는 ‘박산골 사건’이라 불리는 참극의 어린 희생자 중 하나이다. 아무 무기도, 저항도 없는 사람들을 처단하는데 군인들은 온갖 전투 장비를 다 동원했다.

소위 ‘견벽청야’라는 작전명으로 황당한 일을 벌인 국군 제11사단의 당초 임무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은 전쟁이 언제 어떻게 벌어졌는지조차 모른 채 평화롭게 농사짓고 살아가던 어른들과 산등성이와 들판을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이었다.

오늘날 거창양민학살사건이라 이름 붙여진 이 비극은 1차로 2월 9일 청연마을, 2차로 2월 10일 탄량골에 이어 3차로 2월 11일 박산골에서 이어지며 총 719명의 억울한 목숨을 앗아갔다.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359명이 15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에 조성된 거창사건추모공원에는 이 희생자들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재주의 무덤 곁에는 이수양(1947년생) 송선식(1948년생) 등 한 날 나란히 숨진 더 어린 동생들의 무덤도 있다. 기가 막히게도 이 희생자들에게는 사망 후 ‘통비분자(通匪分子)’라는 누명까지 덧씌워졌다.

전쟁 후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국회와 언론을 통해 폭로되고, 재판을 통해 군인들의 과오가 명명백백 밝혀진 이후에도 이들의 명예는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훗날 군사정권의 하수인들은 되레 이들의 묘를 파헤치거나 추모비를 파손하는 악행까지 저질렀다. 억울한 죽음을 겪고도 그들은 또다시 긴 세월 숨죽이며 지하에서 지내야만 했다.

전쟁이 남긴 비탄과 증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국군과 UN군의 인명피해는 사망자 17만8559명을 포함해 부상자 실종자 포로까지 총 77만6360명으로 집계된다. 북한 인민군의 피해는 사망자 50만여 명을 포함해 총 60만여 명에서 80만여 명 사이로 추정된다. 중국 공산군의 피해도 본인들은 약 40만명, 우리 측에서는 약 97만명으로 추정한다.

민간인의 피해상황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남한에서만 사망 민간인 24만4663명, 학살된 양민 12만8936명을 비롯해 부상 납치 행방불명된 인원까지 합쳐 99만968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북한의 인명피해는 대략 150만여 명으로 본다.

여기에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 320만여 명,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 30만여 명, 부모를 모두 잃은 전쟁고아 10만여 명까지 합하면 사실상 전 국민이 전쟁으로 인해 가족 친지 등의 인명피해를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시간짜리 특집방송으로 편성되었던 1983년의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엄청난 반향 속에 무려 183일간이나 지속되며 전세계적인 화제가 된 기억, 정권 차원의 선심에 의존해야 하는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이 답보를 거듭하며 수많은 이들을 애태우는 상황, 지금도 전쟁 당시 숨진 장병들과 학살 양민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그 고통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까지 37개월에 걸쳐 벌어진 전쟁이 이 땅에 남긴 상처들은 이토록 크다. 엄청난 인명피해, 거기에 더해진 물질적 정신적 피해만도 적지 않은데 전쟁은 우리의 기억 속에 더 큰 심각한 흔적을 새겨놓았다. 바로 비탄과 증오이다.

사무치는 감정에서 자라난 적개심은 또 다른 희생자들을 향해 칼을 겨누고, 도발과 응전을 재생산한다. 그로 인해 남북관계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갈등들에까지 이념과 사상을 덧씌우는 긴장상태가 70년간 이어져왔다.

제주 4·3평화공원에 설치된 변병생모녀상. 학살을 피해 도망치다 눈 속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이들의 모습은 전쟁의 아픔을 서로 어루만지는데서 평화와 통일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고 웅변한다.
제주 4·3평화공원에 설치된 변병생모녀상. 학살을 피해 도망치다 눈 속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이들의 모습은 전쟁의 아픔을 서로 어루만지는데서 평화와 통일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고 웅변한다.

적개심을 넘어 화해와 공감으로
전북 완주군 동상면 소재 신월교회의 원래 이름은 부근 고갯길 이름을 딴 마재교회였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다수의 우익과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하며, ‘맞아죽었다’는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교회 이름을 바꾸게 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알고 보면 마재의 비극은 좌우 상관없이 겪은 사건이었다. 낮에는 군경들이, 밤에는 빨치산이 교대로 지배하는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오히려 기적에 가까웠다.

따지고 보면 전라도 소녀 옥자와 경상도 소년 재주는 똑같은 학살의 피해자임에도, 두 어린 생명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각자의 정치적 지형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다. 한쪽은 이슈를 만들고 추앙하는 반면, 반대편은 무시하고 폄하를 일삼는다. 3만5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신천 학살사건처럼 남북이 서로에게 혐의를 씌운 사건 말고도 명백히 한편의 책임이 분명한 사건이나, 이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들에까지 이런 식의 논쟁은 반복된다.

충북 영동에서 벌어진 노근리 사건에 분노하는 이들이 언제쯤이면 전남 영암의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의 침묵을 거둘 수 있을까. 전쟁 중에 손양원 김정복 조상학 안덕윤 윤형숙을 잃은 한국교회는 이들과 지척에서 살아가다 아군의 오폭으로 숨진 여수 이야포의 희생자들과도 슬픔을 나눌 수 있을까. 천안함을 기리는 이들과 세월호를 추모하는 이들이 함께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날은 과연 찾아올까.

제주4·3평화공원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제주시 봉개동에 조성된 이 추모공원은 4·3사태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의 대결 속에 스러져간 3만 여명의 희생자들을 소속과 이념에 상관없이 기린다.

화해와 상생이라는 가치를 내건 이 공간을 통해 서로의 슬픔들이 비로소 만나 하나 된다. 평화, 인권, 통일 등 성경적 희년사상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도 여기서 발견한다. 6·25보다 먼저 시작되고 가장 나중에서야 대결을 끝낸 4·3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은 제주는 내 쪽의 상처와 저 편의 고통을 동일시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6월도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고 교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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