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뒷담 넘어 3·1만세운동 현장에 가다
오랜시간 학교서 갈고 닦은 애국심, 거리 시위서 표출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가파른 층계 난간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겁 없는 소녀, 껑충한 키 때문에 누구보다 눈에 띄는데 학교 주변에 철따라 피는 오디 살구 등의 과실들을 따먹으러 나갔다가 들켜 꾸중 듣곤 하던 말썽꾸러기,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는 친구들과 잠자리에서 기도하다 느닷없이 ‘명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엉뚱한 마무리로 폭소를 자아내던 엉뚱한 매력의 소유자.

이화학당 시절 이활란 선생(뒷줄 가운데)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촬영한 유관순(뒷줄 오른쪽 끝)의 사진. 곁의 친구들보다 큰 키가 눈에 띈다.
이화학당 시절 이활란 선생(뒷줄 가운데)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촬영한 유관순(뒷줄 오른쪽 끝)의 사진. 곁의 친구들보다 큰 키가 눈에 띈다.

이화학당 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이 대체적으로 기억하는 유관순의 학창시절 모습이다. 충청도 시골 똑순이는 상경해서도 쾌활한 말괄량이로 지냈다. 하지만 마냥 대책 없는 철부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의 속내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감이 가득했다.

밤늦게 공부하다가도 야식을 팔러 다니는 가난한 고학생의 ‘만두나 호야!’ 소리가 들리면 주머니를 털어 팔아주고, 정동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아이를 만나면 가진 돈을 죄다 건네는 따뜻함을 지녔다.

고인이 된 유관순 열사에게 1996년 수여된 이화여고 명예졸업장.

가진 게 충분해서가 아니었다. 넉넉지 못한 가세가 도리어 그녀를 더욱 강하고 부지런하게 만든 것이었다. 사애리시 선교사의 주선으로 학비를 전액 면제 받는 교비생이었지만, 그 밖의 생활비는 손수 벌어야했다. 이화여고 출신으로 역사 관련 직에 주로 종사해온 고혜령 박사는 지난해 발간한 <유관순 횃불 되어 타오르다>(초이스북)에서 유관순이 학교에서 빨래를 일종의 아르바이트 수단으로 삼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빨래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 다섯 명과 함께 그룹을 결성해 남들이 하지 않는 일, 나아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도맡아 감당하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방 청소, 식당 청소 같은 일들을 척척 해내는 부지런한 소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입가에 웃음이 피어난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은 단순히 근면이나 선행의 차원만은 아니었다.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의 단짝으로 나중에 모교의 교장까지 지낸 서명학은 5인 그룹의 결사에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동기가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시절 그녀의 곁에는 앞서 입학한 사촌언니 유예도가 있었고,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쓴 이정수와 서명학, 그리고 5인 그룹에 함께 한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등 여러 친구들도 가까이 어울려 지냈다.

장충단공원의 남산2호터널 부근에 건립되어있는 유관순 열사 동상(사진 왼쪽). 장충단공원에는 일제에 항거한 선열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호국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화여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슨홀 앞마당은 2016년에 유관순 정원으로 꾸며졌다(사진 오른쪽).
장충단공원의 남산2호터널 부근에 건립되어있는 유관순 열사 동상(사진 왼쪽). 장충단공원에는 일제에 항거한 선열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호국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화여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슨홀 앞마당은 2016년에 유관순 정원으로 꾸며졌다(사진 오른쪽).

이들 모두는 애국신앙으로 단단히 무장한 선생님과 선배 언니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일종의 교내 동아리 형태의 모임이었던 이문회(以文會)는 이들이 세계정세와 민족의 현실을 깨닫고, 조국을 위해 자신들이 걸어야 할 길을 찾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매월 세 차례 열린 이문회는 선교사들과 김란사 이성회 등의 한국인 교사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한 모임이었다. 연설, 토론, 창작 작품 낭독, 피아노 연주, 찬송가 독창과 합창 등의 발표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외부 인사들의 초청강연도 마련됐다. “이 모임은 교내 학생 서클의 리더 격으로서 3·1운동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이화백년사>는 기술하고 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입학한 지 4년 차 되던 해, 드디어 그녀와 친구들이 갈고 닦은 애국심을 표출할 기회가 왔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탑골공원을 비롯한 서울 일대에서 개시된 것이다.

만세운동의 주축은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의 종교인들과 학생들이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등을 중심으로 한 학생대표들은 여러 차례 비밀회합을 가지며 3월 1일의 시위를 준비했다. 승동교회에서 열린 마지막 회합에는 이화의 대표도 참여했다.

이화박물관 1층에 마련된 ‘유관순 교실’은 이 공간에서 피어난 애국신앙의 참 표본을 배우게 한다.
이화박물관 1층에 마련된 ‘유관순 교실’은 이 공간에서 피어난 애국신앙의 참 표본을 배우게 한다.

거사가 벌어지기 하루 전 기숙사의 비상종이 울리고, 이에 학교 식당에 모인 학생들은 박인덕 교사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예고를 전해들으며 결의를 다졌다. 유관순은 이미 며칠 전부터 친구들과 강당 한 구석에서 촛불을 켜고 열심히 태극기를 그렸다. 8궤의 위치도 잘 모른 채 엉성하게 그린 태극기였지만, 이를 기숙사 온 방마다 붙이며 분위기를 선도해 왔다.

마침내 거사 당일, 학교 문은 굳게 잠겨있었지만 유관순을 비롯한 친구들은 다른 학생들 10여 명과 함께 기숙사 뒷담을 넘어 시위현장으로 달려갔다. 시내 곳곳으로 번져간 만세행렬은 정동으로도 향했다. 함성을 들은 이화의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며 시위대는 해산했고, 유관순을 비롯한 시위 참가 학생들은 그날 저녁 무사히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는 서곡에 불과했다. 학생지도부는 3월 5일 더욱 격렬하게 전개될 제2차 만세시위를 일으켰고, 이화의 교사와 학생들도 이에 적극 참여했다.

학생들의 안전을 걱정한 교장 프라이 선교사가 온 몸으로 막았지만, 유관순 등은 다시 담을 넘어 남대문으로 향했다. 흰색 치마에 붉은 리본을 머리에 맨 차림으로 이화의 학생들은 만세행렬을 이루고 당당히 서울 거리를 누볐다. 그러다 출동한 일본헌병 기마대와 맞닥뜨렸다. 이들의 진압은 지난번보다 훨씬 강도 높고 잔혹했다. 일본인들이 휘두른 칼과 몽둥이에 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체포되었다.

유관순도 종로 6가 부근에서 경찰에 붙들려 남산의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누구보다 당당하지만 여전히 어리고 가냘픈 소녀에게 공포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코로나19 악재에도 유관순 추모사업 한창
불굴의 애국신앙 계승 활발

유관순이 주도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의거일인 4월 1일 전야에 열리는 봉화제의 모습.
유관순이 주도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의거일인 4월 1일 전야에 열리는 봉화제의 모습.

유관순 열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고인을 추모하고 불굴의 애국신앙을 계승하고자 하는 행사들이 각계에서 펼쳐진다.

유관순기념사업회(회장:류정우)는 충청남도와 함께 ‘21세기 유관순’을 발굴한다는 취지로 해마다 애국 공적이 뚜렷한 여성 개인 혹은 단체에 유관순상을, 모범적인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을 대상으로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한다. 올해에는 손정자 효·칭찬지도사교육원 원장이 유관순상을, 한영외고 김민진 학생 등이 유관순횃불상을 각각 수상했다.

해마다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열사추모각에서 열리는 유관순추모제는 올해에도 열사 서거일인 9월 28일 개최될 예정이며, 서대문독립공원에 건립 중인 유관순 열사상 제막식도 10월 중 마련할 계획이다. 유관순 평화마라톤대회, 국위선양청소년봉사단 등의 사업은 코로나19 사태로 올해 취소하기로 했다.

천안시(시장:박상돈)에서는 매년 아우내장터만세운동 거사일 하루 전인 3월 말일에 실시하던 봉화제를 코로나19 사태로 중단한 아쉬움을 각종 문화행사들로 달랜다.

5월 15일 천안예술의전당에서 ‘기억을 넘어 여성을 넘어 그 날을 봄’이라는 제목의 추모전시회를 시작으로, 창작연극 <유관순>(9월 17~19일·예술의전당) 유관순 백일장 사생대회(9~11월중·동남구문화원) 행복콘서트 ‘유관순’(10월 23일·유관순기념관 봉서홀) 등의 행사가 예정되어있다.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소장:박종선)는 열사의 순국 100주기 기념 심포지엄을 올해 9월에 예정하고 있으며,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각 분야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논문집 제25호 발간도 준비하고 있다. 해마다 천안시 일대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유관순학교는 현재까지 33기에 걸쳐 1655명의 수료생을 배출했지만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휴식기를 갖는다.

유관순의 모교들에서도 추모사업이 이어진다.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교장:김혜정)는 개교기념일에 즈음해 5월 29일부터 유관순기념관에서 특별기획전시회를 열고 있다. 열사를 소개하는 전시물들에, 이화 동문들이 비즈공예로 제작한 유관순 초상화 등의 작품이 선보인다. 하반기에는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 출신 애국지사 37명을 소개하는 전시회와 기념합창제가 마련된다.

청주 영명중고등학교(교장:이용환)는 지난해 미국감리교여선교회 후원으로 유관순 열사와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의 모습을 함께 담은 조각상 및 기념비 제막식을 가진데 이어, 올해에는 사애리시 선교사의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을 기념하는 축하행사와 전기 출간 등에 한창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