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값없이 주어지는 복음적 은혜

1. 회개는 믿음과 함께 부여되는 은혜의 선물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 은혜로서 그 교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교리와 더불어 모든 복음 사역자에 의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의로운 법에 배치되는 자기의 죄들이 지닌 위험뿐만 아니라 불결함과 혐오스러움을 보고 의식하게 됨으로써, 그리고 통회하는 자들을 향하여 베풀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자기의 죄들을 근심하고 미워하는 가운데 그것들 모두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의 계명의 모든 길에서 그와 동행하고자 추구하며 노력한다.”(15.1~2)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는 주님이 전하신 천국 복음의 시작이었다(마 4:17, 23). 세례 요한도 유대 광야에서 동일하게 전하였다(마 3:1~2). ‘구원의 길’은 주 예수를 믿음에 있다(행 16:17, 31). 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름에 있어서 필히 회개가 함께 있다. 요한이 잡힌 후 주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믿음에는 회개가 따르고, 회개에는 믿음이 따른다. 누구든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바(롬 10:10, 13),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동시에 일어난다(눅 24:47).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시고 높이신 것은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였고(행 5:31),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한 일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고 전하였다(행 20:21).

회개(poenitentia, repentance)는 ‘돌이킴’과 ‘변화’를 의미한다. 회개는 이전 것을 지나 새 것이 되는 것(고후 5:17),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엡 4:22, 24),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고후 4:16), 육신의 생각과 일을 버리고 영의 생각과 일을 따르는 것이다(롬 8:5~6). 회개 가운데, 죄 사함과 의의 전가가 동시에 일어난다. 동시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온다. 동시에 사망이 도망치고 생명이 도입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마 3:8) 옛 사람을 ‘죽임’(mortificatio, mortification)과 새 사람을 ‘살림’(vivificatio, vivification)이 있어야 한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나야 한다. 세상의 것을 토해내고 신령한 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고전 10:3~4). ‘육적인 것’을 제하고 ‘신령한 것’을 거두어야 한다(고전 9:11). 육체에 속한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으로 살아가야 한다(갈 5:24~25).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롬 6:11). 한 평생 죽음의 종 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사탄의 멍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자유와 쉼을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한다(히 2:15, 롬 6:14, 8:9, 마 11:29, 갈 5:1).
회개에는 아무 공로가 없다. 회개를 회개자의 공로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어떤 노력이나 간절함도 회개의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다. 회개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진다. 주님을 만나서 회개하는 것이지, 회개해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문란한 삶을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 남의 것을 토색했던 삭개오,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강도, 스데반을 죽인 후 그것도 모자라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죽이려고 들었던 바울, 이들 모두는 주님이 자기들 앞에 나타나시자 즉시 회개하였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게 되자 그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였다(눅 5:8).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의로운 법에 완전히 배치된다는 사실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마음 속에 일게 한다(고후 7:10), 그리하여 죄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떠나게 한다(겔 18:30). 이렇듯 회개는 쑥과 같이 쓰지만 은혜의 꿀에 버무려져 달콤한 약이 된다.

2. 회개가 없이는 죄를 사함이 없음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이므로, 그것을 죄의 값을 치르는 어떤 무름이나 사죄의 어떤 원인으로 여겨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회개는 모든 죄인에게 필요해서, 그것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사죄를 기대할 수 없다. 어떤 죄도 저주에 합당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작은 경우가 없듯이, 어떤 죄도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초래할 만큼 큰 경우가 없다.”(15.3~4)

선이 지극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자 아무도 없듯이, 죄가 지극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 또한 아무도 없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gratiae Dei in Christo gratuitae actus)이다. 회개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공로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속의 값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회개가 구원을 위한 무름의 값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는다(롬 3:24). 이러한 속량 곧 죄 사함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따른 것이다(요 1:14, 엡 1:7). 우리에게 회개의 열매가 넘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받게 되기 때문이다(요 1:16).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회심(conversio, conversion)이다. 회개의 제1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사 55:6~7).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회개의 눈물은 쓰나 그 무엇보다 더 달다. 회개는 반성문을 쓰는 것이 아니다. 회개한 후에는 회개하기 전보다 나아진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굳은 마음을 더러운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새로운 한 마음을 품게 된다(욜 2:13, 약 4:8). 그리하여 성령을 거역하지 않고(마 12:31~32), 성령의 소욕대로 살게 된다(갈 5:17). 이러한 회개에 맺히는 열매는 ‘죄 없이 함’에 그치지 않고(행 3:19), 새 생명과 새 생활을 얻는 데 미친다. 회개로써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심’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에 있다(롬 6:4).

3. 계속적 회개와 죄에 대한 고백

사람들은 일반적인 회개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바, 자기의 특별한 죄에 대해서 특별한 회개를 하려고 애쓰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반드시 모든 사람은 자기 죄를 하나님께 사적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죄에 대한 사함과 더불어 죄를 버림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가운데 자비를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기 형제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실족시키는 자는 기꺼이 자기 죄를 위한 사적 혹은 공적 고백과 비통함으로써 자기의 회개를 범법을 당한 자들에게 선언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자기와 화해되고 사랑으로 자기를 영접하도록 해야 한다.”(15.5~6)

구원에 이르는 단번의 회개로 새 생명을 얻은 성도가 거듭난 자로서의 새 생활을 누리려면 날마다 계속적인 회개(poenitentia continua, continual repentance)를 해야 한다. 성도에게는 죄의 지배가 끝이 나고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지만(엡 5:26~27, 롬 6:12), 여전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다투고 ‘영의 새로운 것’과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서로 다투며 사탄의 사자가 속에서 찌르는 곤고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갈 5:17, 롬 7:6, 롬 22~25, 고후 12:7).

성도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야 한다(고전 15:31). 지상의 삶에는 완전함(perfectio, perfection)이 없다. 지상의 성도는 ‘완전한’ 영화가 아니라 ‘완전해지는’ 성화의 단계에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여호와께로 돌이켜 죄와 허물이 사해지는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사 55:7). 회개의 은혜는 칭의와 성화의 단계에서 계속된다. 회개는 단지 내적 통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참 회개는 단지 뉘우침에 그쳐서는 안 되며, 순결함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각각의 죄에 대한 회개가 계속되어야 한다. 마음과 행실로 더럽혀진 그릇을 날마다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그곳에 채워야 한다(롬 9:23).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높아진 것을 겸비하게, 맹목적인 자기애를 자기부인으로, 들뜬 마음을 애통하는 마음으로, 자만하는 심령을 상한 심령으로 고쳐야 한다.

모태에서부터의 죄와 직접 지은 죄를 모두 자복해야 한다. 자복하면 하나님이 사하여 주시고 깨끗하게 하신다(시 32:5; 요일 1:9). 죄의 고백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해야 한다. 회개의 고백은 기도가 된다(시 51편).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그에게 기도하면 홍수라도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시 32:6).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것’이다(스 9:4). 그 떨림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다(스 10:2).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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