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독립 꿈꾸던 신앙의 땅서 올곧게 자라다
일제 항거의 독립 신념 뚜렷했던 마을 … 시시비비 분명히 가리던 당찬 소녀

유관순은 더 이상 신화적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신앙과 애국의 문제로 고뇌하며 그 신념을 실천한 인물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사진은 2007년 제작된 열사의 표준영정.
유관순은 더 이상 신화적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신앙과 애국의 문제로 고뇌하며 그 신념을 실천한 인물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사진은 2007년 제작된 열사의 표준영정.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듯하여/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동요 <유관순> 가사 전문)
강소천이 작사하고, 나운영이 작곡한 이 노래는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 영원한 ‘누나’를 만들어주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항거한 청춘의 열사는 그렇게 온 겨레의 품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한 마디로 국민영웅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왜 그렇게 살고 죽어야만 했는지를 아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기껏해야 ‘3·1만세운동 때 만세 부르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숨진 여학생’ 정도로 기억하거나, 아예 현실세계와는 거리가 먼 신화의 영역에 그를 묻어두기도 한다.
2020년은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우리가 ‘유관순’이라는 이름에 가까이 다가가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는 뜻이다. 본지에서는 유관순이 살았던 열여덟 해 짧은 생애를 다섯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살피며, 우리 세대가 살아가야 할 신앙의 길과 애국의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유관순 일가가 다닌 지령리교회는 1967년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의 후원을 받아 매봉교회로 복원되었다. 교회당 1층 전시관에서 매봉교회가 간직한 항일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유관순 일가가 다닌 지령리교회는 1967년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의 후원을 받아 매봉교회로 복원되었다. 교회당 1층 전시관에서 매봉교회가 간직한 항일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1907년 가을이었다. 한 무리의 일본군 부대가 목천군에 진입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퇴위와 굴욕적인 정미7조약 체결에 분개한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났고, 이들은 목천을 비롯한 충청도 산악지대에 집결했다. 긴급히 진압하러 온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강력한 토벌작전을 벌였다. 의병들 뿐 아니라 이들에게 협조하는 주민들까지 학살하는 잔인한 행위를 벌인 것이다. 그 와중에 ‘아내(아우내)’에 있는 교회당 한 곳이 불탔고, 가까운 사자골에서는 기독교인 3명이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매봉교회가 낳은 민족의 보배 유관순> (신앙과지성사)의 저자 홍석창 목사는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화재로 예배당을 잃은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매봉교회 전신인 지령리교회라고 밝힌다. 지령리는 현재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곧 유관순의 생가가 있는 마을의 옛 이름이다.

지령리에는 스크랜튼, 스웨어러 등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 1900년대 초에 교회가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에 ‘대지령야소교당’이라는 이름으로 지령리교회 성도 82명이 총 21원 5전의 의연금을 기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천안시가 조성한 유관순열사사적지의 추모각.
천안시가 조성한 유관순열사사적지의 추모각.

기부자 명단에는 유성배 유중무 등 유관순 일가와, 조성택 조형원 등 훗날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명성을 떨친 조병옥 일가의 이름들이 포함되어있다. 이들은 기독교신앙을 기반으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 인물들이었다. 불에 탄 예배당을 복구하면서 유중무는 선교사로, 조인원은 속장으로 중책을 맡아 교회를 이끌었다.

유관순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지닌 마을과 가문에서 유중권 이소제 부부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고흥 유씨 족보에는 유관순의 출생연대가 1904년으로 기재되었으나, 호적과 훗날의 수형기록표 등에는 1902년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중 나란히 순국한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 이소제의 합장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중 나란히 순국한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 이소제의 합장묘.

그와 가까웠던 이들이 생존 시 남긴 증언에 따르면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빠 유우석은 혼자서 한글을 깨치고 성경을 읽어 내려간 여동생에 대한 기억을,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남동순은 사내아이처럼 활달하며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강한 승부욕을 지닌 친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밝힌 바 있다.

날아가는 매의 형세를 닮았다 하여 ‘매봉’이라 불리는 용두리의 산자락 주변에는 유관순이 뛰놀던 생가와 언덕길, 유관순 일가가 함께 다니던 지령리교회를 재건한 매봉교회, 해방 후 유관순의 유족들을 위해 정부에서 마련해 준 한옥 가옥 등이 관람객들을 반긴다. 특히 유관순 부모의 합장묘가 있는 매봉 아랫자락에는 유관순의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기록되어있다.

유관순이 사촌 유경석과 노마리아의 아들인 조카 유제경의 돌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만든 것으로 알려진 뜨게모자.
유관순이 사촌 유경석과 노마리아의 아들인 조카 유제경의 돌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만든 것으로 알려진 뜨게모자.

‘어느 날 유관순의 동생 인석이가 동네 아이와 다투던 중 넘어져 돌멩이에 부딪쳐 다치는 일이 있었다. 유관순은 동생 인석이가 먼저 잘못한 사실을 알았으므로 동생 인석을 두둔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유관순의 아버지는 “넌 누나가 돼서는 어찌 그리 야박하게 따지고 드는 거냐”하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유관순이 ‘전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는걸요. 사람은 언제나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릴 줄 알아야 한다고요’라고 대답하고, 아버지는 ‘내가 딸을 키우는 줄 알았는데 어느덧 그 딸이 선생이 되어 날 가르치는구나’라며 웃음지었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때 아버지 유중권은 알았을까. 그토록 당찬 자신의 딸이 바로 그 강직함으로 인해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걷게 될 것을. 그리고 구국의 상징으로 길이 이름을 남기는 존재가 될 것을.

애국신앙 표본인 유관순 일가
기득권 버리고 ‘대의’에 헌신

유관순이 태어난 집안은 고흥(高興) 유씨, 혹은 흥양(興陽) 유씨라고도 부르는 명문가이다.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 퇴치에 큰 공을 세운 유탁, ‘어우야담’으로 설화문학을 집대성한 유몽인 등이 이 가문의 선조들이다. 조선 말기의 의병장 유인석도 같은 집안 출신이다. 대대로 애국심과 의기가 투철한 가문이었던 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집안에 기독교 신앙이 들어온 것은 유관순의 6촌 할아버지 유빈기(유성배)가 미국인 감리교선교사 엘머 케이블(한국명 기이부)을 만나 예수를 믿고, 대중에게 성경을 보급하며 복음을 전하는 매서인(賣書人)이 되면서부터였다.

유관순이 나고 자란 마을에 복원된 열사의 생가. 국가 사적지 제230호로 지정되어있다.
유관순이 나고 자란 마을에 복원된 열사의 생가. 국가 사적지 제230호로 지정되어있다.

유빈기가 고향 마을에 케이블 선교사를 초청해 전도하면서 지령리교회를 세운 전후로, 집안 식구 상당수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을 때 유씨 일가는 다른 지령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의연금 납부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 중에는 유관순의 할아버지 유윤기도 있었다. 유윤기의 아들 며느리 손자 대부분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중에, 집안 장남이자 유관순의 아버지였던 유중권은 유일하게 개종하지 않았다. 집안 제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유중권은 넉넉지 않은 가세에도 불구하고 후세들을 위해 병천 흥화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가족들의 종교활동과 구국활동에도 호응을 보내준 인물이었다. 덕분에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과 함께 유관순 또한 당당하게 애국신앙을 표출하며 자라났다. 작은 아버지 유중무와 사촌 유예도 유경석 등도 지령리교회를 섬기다, 아우내 만세운동을 함께 주도하며 위대한 가문의 위용을 보여준다.

집안 며느리들의 기개 또한 못지않았다. 유관순의 올케인 조화벽은 양양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만세운동으로 가족을 죄다 잃은 유관순의 두 동생 인석과 관석을 거두어 대신 돌보아주었으며 이후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였다.

사촌 올케인 노마리아는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지독한 감시와 횡포를 견디며 가족들을 지켰고, 그 아들 유제경은 훗날 신사참배로 징역형을 치른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유씨 일가는 무려 9명에 이르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은 11명을 헤아린다.

감신대 역사신학 교수를 지낸 이덕주 교수는 자신의 저서 <유관순 가(家)의 사람들>(신앙과지성사)에서 이 가족들에 대해 “양반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기득권에 편입되지 않은 채 침략과 수탈에 저항해 온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자랑스런 믿음의 가문은 그저 열망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투철한 사명감과 진정한 헌신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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