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목사(보배교회)

믿음의 길을 지지하고 함께 하는 좋은 친구가 됩시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이명진 목사(보배교회)
이명진 목사(보배교회)

코로나19의 위협이 장기화 되면서 사람들 간에 만남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방역을 위해 ‘생활 속 거리두기’가 계속되면서 심리적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가장 좋은 심리적 방역은 든든한 후원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아도 불편하지 않을 그런 친구를 만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좋은 이웃, 좋은 친구를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중풍 병자입니다. 이 중풍 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생활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께로 인도해 준 사람들로 인해 치유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난 것입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에게 인도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중풍 병자의 오랜 질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중풍은 뇌의 어떤 부분에 혈액 공급량이 줄어들거나 뇌 안에서 출혈이 일어나 몸의 일부분 혹은 전부가 마비되어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기도 힘들어지는 질병입니다. 본문의 중풍 병자도 마비가 와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메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우리 곁에도 무언가에 사로잡혀 마비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이 굳어져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한 번은 시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교회에 출석한 며느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등록한 후 딸이 갑자기 더 아프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바꿔서 집안에 우환이 있으니 빨리 등록한 교적을 빼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자신이 믿어온 종교에 사로잡혀 생각이 마비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본문의 중풍 병자도 생각이 마비되어 언제나 이런 답답하고 불편한 생활이 끝날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마비되어 이 땅에서 행복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복음입니다. 그래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사람들도 다른 이야기를 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은 ‘예수 소문’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마다 질병도 고치고, 인생이 바뀐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질병이든지 못 고치는 질병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으시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보좌에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중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만 치료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영생의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왔을 때 그의 질병부터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소외시키고 단절시킨 죄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의식주 문제가 중요한 부분입니다. 코로나19의 위험 중 생명의 위협도 있지만, 제일 큰 타격은 의식주가 연결된 경제적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경제도 살리기 위해 긴급재난기금까지 지원할 정도입니다. 나라에서도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 벌써 세 번째 추경을 준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육신의 필요가 채워진다고 하여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하고, 또한 영혼의 문제가 해결돼야 합니다. 아니 영혼의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하였습니다. 나뭇잎이 마르는 것은 단순히 가지나 줄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뿌리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마비된 인간의 근본적 치유는 영혼의 회복입니다. 마비의 원인이 된 죄 문제가 해결될 때 참된 자유를 누리며 깨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심리적 방역이 필요한 시기에 든든한 믿음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생각하며 내가 만난 주님을 사랑과 섬김으로 이웃들에게 소개하는 사람임을 잊지 맙시다.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들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는 환자를 메고 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중풍 병자의 동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초라한 모습을 보여도 오늘 꼭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절박함입니다. 이런 절박함을 어떻게 갖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전해 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확신에 차서 예수님을 소개하니 중풍 병자도 동의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이 흔들린다면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힘들고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믿습니다”는 그런 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난 후에 내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경험한 확신입니다.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행복한 표정이 있어야 합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넉넉하고 온유한 인품과 품격이 행동과 언어에 묻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슴을 통과하여 우리의 손끝과 발끝에 묻어나야 합니다. 그런 삶이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고, 예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복음의 능력은 사라지고 말만 앞서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도를 해도 사람들은 겉만 멋있는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수록 전도가 어렵고 교회에 대한 부정적 요소가 많아지는 시대에 우리 신자들이 관심을 갖고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삶의 증거입니다. 그 사람만 보아도 예수님의 향기가 느껴지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삶입니다. 주님처럼 연약한 자와 함께하고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에게 인도한 사람들은 장애물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중풍 병자를 데리고 갔지만 그 집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 곳 바로 위의 지붕을 뜯었습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의 침상을 줄로 묶어서 달아 내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자리인데도 장애물이 있고, 반대로 죄악을 찾아 달려가는데 길이 열립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생각을 따라갈 때 때마침 준비된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계산하며 걸어가는 길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펼쳐주시는 길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방팔방이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와도 하나님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장애물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이 꽉 막힌 환경을 만났을 때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5절)이었습니다. 중풍 병자와 그의 침상을 어깨에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까지 고쳐주셨습니다.(11절) 그래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하늘을 바라보며 끝까지 버텨내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의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평안할 때보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 참모습을 드러냅니다.

코로나19의 위협과 계속되는 재난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지지해 주는 좋은 친구입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친구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믿음과 좋은 친구가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고, 우리 영혼의 소망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무언가에 짓눌려 마비되고 단절된 아픔이 있다면 오늘 곧바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마비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좋은 친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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