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연구하고 설교하는 것은 고유한 임무다. 연구와 강의가 당연하기는 교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이나 수강자들 모두가 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다. 오히려 스마트한 소비자가 되었다. 현대 대부분의 소비자가 그렇듯 설교나 학문의 소비자 역시 공급하는 대로 소비하지 않는 비평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강의 평가는 이미 자리를 잡았고 설교 역시 매우 철저한 평가를 받고 있다. 설교를 실시간으로 펙트 체크한다. 그들은 성경, 찬송뿐 아니라 언제든 정보 검색이 가능한 엔진이 탑재된 스마트한 단말기로 무장하고 있다. 설교 중 예화가 사실인지, 통계수치는 정확한지 바로 확인한다. 예배 후 오류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출처불명의 예화는 쓸 수도 없고 어휘와 표현 방법까지 신경 써야 한다.

따라서 이제 소비자의 입장에서 설교든 강의든 이뤄져야 한다. 듣는 이들은 이미 21세기의 첨단에 서있는데 말하는 자가 19세기적 발상에 강의 스타일까지 구시대적이라면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외면당하는 정도라면 다행이다. 비난과 거부에 더하여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앞에 서는 자는 늘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신학교 시절이나 70~80년대 석사 클래스에 머무르는 설교자나 강의자들이 있다. 이미 사회는 도지사든 시장이든 군수든 아랫사람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을 속된 말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는 세상에 서 있다. 은밀한 행동이나 말, 그리고 수십 또는 백 몇 십 명 정도의 수강자만 의식하면 큰일난다. 사회관계망을 통해 문제 발언은 순식간에 수백만, 수천만에게 전파된다. 코로나19 확산속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므로 목사나 교수로 산다는 것은 더 적절한 어휘와 표현방법을 찾는 일에 게으르지 않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리는 불변이지만 표현과 전달 방법은 계속 진보돼야 한다. 설교든 강의든 듣는 이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해도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잊으면 말할 기회도 잃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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