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시면서 자신을 ‘길’이라고 단언하신다. 그런데 원문에 나오는 관사의 의미를 이 구절에 반영하면 여기서의 ‘길’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수많은 길들 중에 하나가 아니다. 오직 하나뿐인 ‘그 길’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신 것이다.

길을 의미하는 헬라어 ‘호도스’를 영어로는 way, road, way of life(생활 방식) 등으로 번역한다. 고대 헬라문헌에서는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거나 행진하는 장소인 길(way), 작은 길(path), 도로(road), 강줄기(course) 그리고 배의 항로 등의 의미로 쓰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다니는 길, 도로’와 ‘여행의 길, 여정, 노정’ 등에 사용했다. 비유적 의미로는 구약의 용법처럼 하나님의 행위와 구원 사역(롬 11:33; 계 15:3) 하나님의 뜻(마 22:16; 막 12:24)을 나타내거나, 생활방식(행 14:16; 약 1:8)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는 ‘두 길’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고 ‘길’은 넓은 악의 길과 대조되는 의미로서 경건한 좁은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님의 의도는 그리스도인, 곧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길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그 무엇이다. 14절에서 ‘찾는’이라는 문구는 여러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오랜 노력 끝에 좁은 문을 찾아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가 없이는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 자만이 발견하며, 이 길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뿐이다.

요한은 ‘길’을 예수님의 인격에 적용하였다(요 14:1~6).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그 장소와 그 길을 알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바로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히셨다.

토니 캠폴로의 ‘회복’에 이런 글이 나온다. 아인슈타인이 뉴저지주 프린스턴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검표시간에, 차장이 아인슈타인 옆에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기차표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아인슈타인은 호주머니며 서류가방까지 정신없이 뒤졌다. 그 모습을 본 차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인슈타인 박사님이시죠? 기차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박사님 같은 분이 기차표를 사지 않으셨을 리가 없죠. 표를 보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20분쯤 지나 차장이 되돌아왔는데 웬일인지 아인슈타인이 아직도 표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차장은 다시 말했다. “박사님, 기차표는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요. 박사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일어나서 “기차표를 찾으려는 것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서예요”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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