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구원은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이다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1. 의의 전가: 칭의의 유일한 방식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부른 자들이, 그들 속으로 의를 주입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 여기고 받아들이심으로써, 그들 안에서 야기된 어떤 것이나 그들에 의해서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 자체나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서 그들에게 돌리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무름을 그들에게 돌리심으로써,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함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11.1)

하나님은 창세 전에 정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이 세상에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다(롬 8:30). 의롭다 하심은 의롭게 여기심을 뜻한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롬 4:6).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롬 3:24). 이는 하나님이 죄를 돌리시지 않고(고후 5:19), 죄를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롬 4:8).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는 불법인바(요일 3:4),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기 때문이다(롬 4:7).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이러한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롬 4:6~8). 타락한 인류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하여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롬 3:24), 자기의 독생하신 아들을 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셔서(롬 8:32; 빌 2: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롬 3:24),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행 13:38~39).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롬 3:28). 그리스도는 대속의 모든 의를 다 이루셨다(요 19:30).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왕-제사장 혹은 제사장-왕으로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아버지께 드리셨고, 아버지는 그 제사를 받으시고 그 제물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셨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신 아들을 아버지가 받으셔서 아들 자신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셔서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위한 모든 의를 이루게 하시고 그 의가 우리의 의가 되게 하신 것이다(고후 5:2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단번에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다(엡 5:2; 갈 1:4; 딤전 2:6; 딛 2:14; 히 10:10~14). 아버지는 자기에게 드려진 그 아들 자신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주셨다. 아들을 통하여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다(행 2:33; 요 15:26). 그리하여 그 아들이 우리 안에 사시게 되었다(갈 2:20).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됨과 다르지 않다(롬 1:6; 8:9).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심과 다르지 않다(행 2:36; 3:15). 우리는 일한 것이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롬 4:6).

칭의(iustificatio, justification)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를 자질이 변화되어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여겨서 의화(義化)라고 부르고, 마치 그것이 성화(聖化)의 일부가 되는 듯이 여기지만 헛된 궤변에 불과하다.

칭의는 무조건적 은혜로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는 하늘 법정의 선포이다. 이는 오직 한번 있으므로 단회적이고, 우리의 어떠함에 따르지 않으므로 절대적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품성이나 행실이나 소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시는 인침이므로 인격적이다. 우리는 언약의 대표의 원리에 따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롬 5:18). 오직 이 점에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롬 5:19).

2. 믿음: 칭의의 유일한 도구

이렇듯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도구이다. 진정 이 믿음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사람 안에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줄곧 모든 다른 구원적 은혜에 수반되고 사랑으로써 역사한다.”(11.2)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써(sola fide, by faith alone) 의롭다 함을 얻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롬 3:24; 4:5; 갈 2:16). 하나님은 오직 믿음만을 의로 여기시고 의로 정하신다(창 15:6; 롬 4:3; 갈 3:6). ‘믿음의 법’은 ‘행위의 법’과 배치된다. ‘믿음의 법’은 ‘오직 믿음의 법’으로만 작용한다(롬 3:27).

구원의 의, 값, 공로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무름(satisfactio, satisfaction) 외에는 없다. 일찍이 보아스가 그 예표가 된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되신다(룻 3:9, 12, 14). 오직 그만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다(고전 1:30).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누림은 오직, 전적인,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면 이를 피할 자 아무도 없다(롬 8:30).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참 빛이신 생명의 주를 영접한다(요 1:4, 9, 13; 행 3:15). 영접은 첫째,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내 안에 모시는 것이다. 셋째,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이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빛과 교제하고 교통하며 사는 것이다. ‘빛의 자녀’(엡 5:8)로서 ‘빛의 갑옷’(롬 13:12)을 입고 ‘빛의 열매’(엡 5:9)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들 속에 비취므로(고후 4:6) 어둠에 속하지도(살전 5:5), 어둠과 사귀지도 아니하며(고후 6:14) ‘큰 빛’(행 22:6), ‘해보다 더 밝은 빛’(행 26:13) 가운데 거하게 된다.

이렇듯 구원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한다(갈 5:6). 행위는 열매이지,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다. 우리가 새롭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는다(딛 3:5). 우리가 극상품 포도를 맺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으셨기 때문이다(사 5:2).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도구이다(히 11:1, 6). 그러나 믿음에는 아무 공로가 없다. 믿음의 열매인 선행에도 아무 공로가 없다. 우리의 살아남도 살아감도, 생명도 생활도 모두 은혜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됨은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는다(히 10:10).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3.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 칭의의 유일한 값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빚을 자기의 순종과 죽음으로써 전적으로 갚으셔서 그들 대신에 자기 아버지의 의에 대한 고유하고 실제적이며 전적인 무름을 행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들을 위하여 그를 주셨고 그의 순종과 무름 모두가 그들 안에 있는 그 무엇 때문도 아니라 값없이 그들의 자리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칭의가 오직 값없는 은혜로부터이니 하나님의 엄정한 의와 부요한 은혜가 죄인들의 칭의에 있어서 찬미를 받게 하려 함이었다.”(11.3)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빚을 자기의 순종과 죽음으로써 전적으로 갚으셔서 그들 대신에 자기 아버지의 의에 대한 고유하고 실제적이며 전적인 무름을 행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들을 위하여 그를 주셨고 그의 순종과 무름 모두가 그들 안에 있는 그 무엇 때문도 아니라 값없이 그들의 자리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칭의가 오직 값없는 은혜로부터이니 하나님의 엄정한 의와 부요한 은혜가 죄인들의 칭의에 있어서 찬미를 받게 하려 함이었다.”(11.3)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된 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되, 값없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잉태로부터 죽으심까지의, 영혼과 육체의 전인(全人)에 있어서의, 당하신 순종(obedientia passiva, passive obedience)과 행하신 순종(obedientia activa, active obedience)을 모두 아우르는 값이 대신 지불되어 된 것이다.

구원은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이다(롬 5:17). 믿음은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에는 그 어떤 자질도, 값도, 공로도 없다. 아담의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었다(롬 5:18).

오직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린다(엡 1:7; 2:7).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가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지만 그리스도가 친히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셨다(사 53:6). 그가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므로(벧전 3:18; 롬 1:3~4), 우리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롬 6:5, 8).

그러므로 우리는 무교절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나를 부풀리지 말고 겸손히 허리를 동이고 신을 신은 채 지팡이를 짚고 이 세상을 속히 지나가야 할 나그네 길로 여기며 우리 가정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린 그리스도의 피만을 바라보도록 하자(출 12:7~11). 다른 꾐에 넘어가지 말고 우리 속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도록 하자(갈 3:1).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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