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태 목사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옛 대구 남문인 영남제일관에 올라서면 친일파에 의해 훼파된 대구읍성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볼 수 있다.
옛 대구 남문인 영남제일관에 올라서면 친일파에 의해 훼파된 대구읍성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볼 수 있다.

현재 대구의 가장 번화가는 동성로다. 동성로는 대구의 중심에 있고, 가장 발달한 상권을 갖고 있으며, 젊은이들의 거리로 명성을 누린다. 하지만 대구에는 동성로(東城路)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성로(西城路), 남성로(南城路), 북성로(北城路)도 있다.

거리의 이름을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의 존재이다. 이 거리의 원래 자리에는 성이 있었다. 대구읍성이 대구 원도심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명언이 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정복하면 그곳에 길을 닦았다. 가장 강력한 군대를 소유했던 로마는 굳이 로마 주변으로 성벽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대신 큰 길을 내고, 어디든 반란이 일어나면 그 지역으로 병거를 몰고 가서 빠른 시간에 진압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 이유는 여기 있었다.

반면에 중국은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두 제국의 선택은 이렇게도 달랐고, 그 선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엄청난 후과를 가져 왔다. 성벽은 길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면 대구를 둘러싸고 있던 대구읍성은 왜 사라지고 말았을까. 대구에 갑자기 개방의 바람이 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다. 대구읍성은 안타깝게도 일제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 일본상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훼손되었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대구역이 개설되었다. 기차가 지나고 서는 역이 만들어지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상인들은 대구 성읍 밖에서, 특히 북문과 동문 바깥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읍성 안의 상권은 대구상인들이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읍성은 일본상인들에게 대구상권 진입을 막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날 정도로 친일파였던 대구 군수 박중양은 조정에서 대구읍성 철거를 반대했음에도, 일본상인들과 결탁하여 대구읍성의 대부분을 철거해버렸다. 그 이면에는 일제에 대한 대구 사람들의 불복종 정신을 무너뜨리려는 박중양의 의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1906년 대구읍성은 완전히 철거되고, 그 자리에 10미터 남짓 너비의 신작로가 생겼다. 그 길이 바로 지금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다. 그 길들이 지금 번화가로 상전벽해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대구의 아픔을 간직하고도 있다.

대구에서 동성로의 젊음을 느끼고, 북성로 우동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라. 대구의 번화가를 걸으면서 대구 읍성의 4대문, 즉 동문(진동문) 서문(달서문) 남문(영남제일관) 북문(공북문)의 흔적을 살펴보시라.

특히 1980년에 대구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이 금호강변에 다시 중건되었으니 그곳도 꼭 들러보시라. 영남제일관에 올라서서 대구읍성 벽이 무너지고 길이 뚫렸던,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보시라. 나라의 힘이 약해져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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