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우리 삶에서 가장 슬픈 일이 사랑하는 가족의 사망이라면, 가장 기쁜 일은 새로운 가족의 출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일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배우지만, 그 일들을 크게는 슬픔과 기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경에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사건들이 곳곳에서 나온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말씀하신다. 결국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다 떠나가고 여자만 남았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고 하신 것을 증언한다. 지금까지 그 여자는 어둠에 다녔지만 예수를 만나 구원 받은 후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라’는 교훈을 받는다. 예수를 만나면 어둠(슬픔)이 변하여 빛(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 여자의 간음 행위를 돌로 쳐서 죽이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판단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날 이후 여자가 죄의 형벌로 슬퍼하는 삶이 아닌 구원 받은 자로서 새로운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은혜)의 판결을 하셨다. 이 사랑의 판결은 다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셨던 용서의 판결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큼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주제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에게만 유리하도록 이기적인 판단을 내림으로 은혜와 사랑의 범위 안에 들어가야 할 다른 대상들을 제외하는 교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는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그 아가페의 대상이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이웃만이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이웃까지도 포함하는 역설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랑하기 싫은 사람들을 대상에서 제외하는 밑바탕에는 이기심이 작용한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판결과 십자가에서 행하신 용서의 판결은 아가페가 요구하는 대상을 분명히 제시한다. 하지만 나의 이기심은 이웃들 중 어떤 이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며 이기심에 얽힌 판결을 내린다. 그 결과 우리는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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